[서소문 포럼] 아빠 찬스, 엄마 찬스 그리고 기회 사재기

염태정 2019. 10. 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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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정 내셔널팀장
10대 중반 여학생의 손에 ‘문재인 퇴진 조국 구속’이라 쓰인 선전물이 들려 있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는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과 다정히 손잡고 광장을 걷고 있었다. 지난 3일 오후 광화문·시청 일대에서 열린 보수 단체 주도 집회엔 젊은 층, 가족 단위 참여자가 꽤 보였다. 이전 보수 집회에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10대 학생, 중·장년 학부모를 보수단체 집회로 끌어들인 것은 조국 장관 딸·아들의 대입 문제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거다. 서울대·KIST 인턴, 의학 논문 제1저자, 의학전문대학원 합격에 꽤 영향을 발휘했을 대학 총장상…. 보통의 부모들은 안다. 좋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인턴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두 아들의 중·고등학교 시절 아이들이 봉사할 곳을 찾기 위해 밤늦게 인터넷을 뒤적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대부분 한강 쓰레기 줍기로 결론 났다. 그나마도 구하면 감지덕지했다. 괜찮다 싶은 곳은 언제 마감됐는지 모르게 다 끝나 있었다. 3일 광화문 집회에서 흘러나온 “조국의 딸이 공정하게 대학에 갔습니까”라는 사회자의 멘트엔 이런 마음이 반영됐을 것이다. 5일 서울 반포대로에서 열린 진보·보수 단체의 맞불 집회장에도 ‘내 딸이 먼저다. 조국 딸처럼 키워주지 못 해줘서 엄마 아빠가 미안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아들과 곽상도 자유한국당 의원 간에 아버지·시아버지 찬스 논쟁이 벌어졌는데, 누가 뭐래도 찬스 사용의 으뜸은 조국 장관 가족일 거다. 자식들은 인턴과 총장상에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쓰고 부인은 압수 수색에 남편 찬스를 쓴다. 그들은 그 찬스를 이용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기회를 갖는다. 그럴 기회를 갖기 힘든 보통 사람들로선 분통이 터진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들이 부럽다. 조 장관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청문회 등에서 미안함을 표시했는데 얼마나 진심이 담겼는지 모르겠다. 『진보집권플랜』에서 공정과 도덕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교수 조국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최근 조 장관과 그 가족이 보이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리처드 리브스가 쓴 『20 vs 80의 사회』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다루고 있다. 원제는 『Dream Hoarders』인데 ‘꿈 독식자들’ 또는 ‘꿈 축적자들’ 쯤이 될 거다. 저자는 상류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사회 불평등 구조를 유지하는가를 설명한다. 불평등 구조 유지의 핵심은 ‘기회 사재기’다. 주로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다. 첫째는 부자들의 동네·학교·집값 유지를 위한 배타적인 토지 용도 규제, 둘째는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 셋째는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분배다. 이를 통해 부를 유지하고, 명문대·좋은 직장 갈 기회를 상류층이 먼저 잡는 거다. 개천에서 용 나는 걸 불가능하게 하는 거다. 저자는 ‘사재기가 가능하려면 희소해야 한다. 명문대학이 좋은 사례다…. 인턴에도 기회 사재기가 만연해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한마디를 더 한다. ‘(이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심각한 문화적인 장벽이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커다란 장벽 중 하나는 중·상류층이 자신의 지위가 전적으로 자신의 실력 덕분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 이야기라고는 하나 우리 사회의 일부 상류층, 특히 조 장관 가족을 대입하면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수사가 진행 중인 표창장 위조 혐의, 허위 인턴 여부는 둘째치고, 조 장관 가족은 자신들의 실력이라 믿으며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막아버린 ‘기회 사재기’를 한 거다.

염태정 내셔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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