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기다려 소아병동 왔더니.."3개월 후 나가라"

이종섭 기자 2019. 10. 8.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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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병원 떠돌이’ 현실은

대전 서구 관저동 건양대병원 소아낮병동에서 치료사가 어린이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이종섭 기자

석광국군 가족이 겪은 재활치료 과정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뇌병변이나 발달장애 등 지속적인 재활치료가 필요한 장애아 가족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안정적으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등록 현황 자료를 보면 지난해 국내 19세 이하 장애 인구는 모두 9만68명이며, 이 중 1~3급의 중증장애인이 7만7683명으로 86.2%를 차지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치료기관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거나 병원을 찾아 떠도는 ‘재활 난민’ 신세에 놓여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유아기에 장애 진단이나 장애인 등록을 미루는 경향을 감안하면 수치상 드러난 것보다 실제 재활 난민 숫자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 소아재활치료가 가능한 의료기관은 전국에 200여곳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4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장애아 가족들이 ‘난민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다.

■ 치료받을 곳 없는 ‘재활 난민’

진료 받으며 다른 병원 찾아

전국 전전하다 예약 안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 손 놓게 돼”

충북 청주시에 사는 권도경군(7)도 수년간 매일 엄마와 함께 대전으로 치료를 다니며 난민 생활을 했다. 권군은 3살 때 심하게 경기를 하며 넘어진 후 뇌병변과 언어장애 진단을 받았다. 집중적인 조기 재활치료가 필요했지만, 청주에 있는 유일한 소아낮병동은 대기 수요가 많아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했다. 대전에는 소아낮병동 3~4곳이 운영 중이라 조금 형편이 나았다. 하지만 대전에서도 1곳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기간은 6개월 정도로 제한됐다. 치료를 받으며 다른 병원에 미리 대기 신청을 해놓고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나마 운이 좋아 중단 없이 치료를 이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권군은 올해 특수학교에 들어가 매일 대전을 오갈 수 없게 되면서 사실상 치료를 중단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 사설 치료기관에서 잠깐씩 재활치료를 받는다. 권군 어머니(39)는 “병원이 부족해 주변 장애아 가족 대부분이 초기에는 서울로 갔다가 대전으로 이동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경로를 거친다”며 “지금 치료로는 도경이 상태가 나아지길 기대하기 어렵지만 교육도 포기할 수 없고 동생들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픈 아이 손을 놓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 40%가 수도권에 있지만

원정 치료자 많아 대기 길어

이런 상황은 지방 중소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재활치료기관이 있지만 장애아동 숫자도 그만큼 많다.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오는 원정치료 수요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치료시설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다. 인천에 사는 임시후군(8·뇌병변 1급)은 3년여간 서울·경기 지역 병원을 돌며 재활치료를 했다. 조기 집중치료를 위해서였다. 치료 대기자가 많아 길어야 3개월 정도로 입원 기간이 제한되기 때문에 퇴원 날짜 전에 다른 병원에 대기 신청을 해놓는 방식으로 서울과 경기 성남·용인 등지의 재활병원을 옮겨다녔다.

낮은 의료 수가에 힘든 진료

민간 병원은 적자로 문 닫아

더 이상 원정치료를 지속할 수 없어 인천의 한 병원 소아낮병동에서 치료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병원 소아낮병동이 갑자기 문을 닫은 것이다. 이후 다른 병원의 소아낮병동을 찾아갔지만 이곳에서도 치료를 지속할 수 없었다. 소아낮병동은 대기 환자와 운영상 문제로 치료 기간에 제한을 둘 뿐 아니라 치료 중에도 지각이나 결석 등 병원 출석을 엄격히 관리한다. 임군은 불가피하게 몇 차례 치료시간을 맞추지 못해 병원 방침에 따라 치료를 중단해야 했다. 지금은 다시 대기 신청을 하고 6개월 가까이 병원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치료 꺼리고 문 닫는 민간병원

소아재활은 기본적으로 수익성이 낮아 민간병원에서 치료를 기피하는 영역이다. 재활치료 자체의 의료수가가 낮은 데다 소아재활은 성인과 달리 치료사의 일대일 치료를 필요로 하는 등 치료 난도가 높고 진료 수입은 적어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병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민간병원에서 소아재활치료를 중단하는 사례가 나타나는 이유다. 경기 고양시의 한 대학병원도 지난 3월 이 같은 이유로 소아낮병동 운영을 중단했다. 당시 병원에서 낮병동 운영 중단 통보를 받은 장애아 부모들은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하며 병동 폐쇄를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런 여건 때문에 장애아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요구해왔다.

민간에서 제공하는 재활의료 서비스로는 장애아동의 치료 수요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부도 공감한다. 정부는 권역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국정과제로 선정해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 반영했다. 전국에 3곳의 어린이재활병원과 6곳의 어린이재활의료센터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장애아 가족들은 현재 정부 계획으로는 부족한 재활의료 서비스 공급 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장애아동의 재활치료 수요가 과소 추정돼 어린이재활병원 건립 규모가 축소됐다는 지적이다.

복지부 계획은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정책용역과제로 수행한 ‘어린이재활의료 확충 방안 연구’를 토대로 마련한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뇌성마비와 발달지연, 중추신경계나 말초신경계 질환, 근육 질환 등으로 진단받은 만 19세 미만 환자가 2014년 기준 29만440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의료기관에서 실제 재활치료를 받은 환자 1만9896명만을 재활치료 수요로 분석해 권역별 재활병원 규모 등을 제안했다. 하지만 “제시된 규모는 현재의 수요·공급을 바탕으로 추산한 것”이라며 “치료가 필요함에도 지리적 여건이나 사회경제학적 문제 혹은 치료를 받을 곳이 없거나 대기 기간이 길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의 규모가 일정 부분 존재할 것으로 판단되나 정보를 얻을 수 없어 연구에 반영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명시했다.

“어린이재활의료센터 정책

실제 수요 과소 추정 한계

전국에 병원 건립 확대를”

결과적으로 치료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없는 형태와 규모로 정부 계획이 추진되면서 지역마다 공공어린이재활병원 확대 요구는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경기, 인천, 광주, 울산, 경남, 경북 등 지역에서 장애아 가족을 중심으로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시민 태스크포스가 결성돼 활동 중이다. 경기 성남시에서는 공공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기 위한 주민 발의 조례 제정 운동도 펼쳐지고 있다. 김현정 인천 시민TF 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권역별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약속했지만 당초 계획과 달리 3곳에만 병원을 짓고 나머지는 외래 중심의 치료센터를 설치하는 것으로 축소했고, 수도권은 환자 수를 감안하지 않고 의료기관이 몰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업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장애아 가족이 민간병원의 진료 축소와 반복되는 치료 대기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섭 기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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