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으로 우리말 지켰는데.."기념 공간조차 없어"

서창우 입력 2019. 10. 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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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 앵커 ▶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말모이' 일제 시대, 어떻게든 우리 말을 지켜내려는 한글 학자들의 투쟁과 저항이 담긴 영화죠.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이름인 국어학자 이극로 선생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월북을 하면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보니 그를 기억할 작은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서창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영화 '말모이' 中]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고루 이극로 선생의 이 외침은 일제에 맞선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직업도 갖지 않은 채 서너 시간 쪽잠을 자며 우리말 연구에 몰두한 이극로 선생은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외래어표기법 통일' 이라는 이른바 '3대 우리말 규범'을 제정했습니다.

비록 남북은 분단됐지만 이 선생이 이끈 조선어학회 한글 운동 덕에 말과 글의 분단은 없었습니다.

[박용규/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우리 말과 한글을 통일해 뒀다. 그 통일은 바로 해방된 조국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독립의 준비물이었던 거죠."

한창, 사전 편찬에 속도를 내던 1942년.

이극로 선생은 일제가 한글 학자들을 가두고 탄압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내가 조선 땅에 들어선 날부터 국어 운동에 심력을 바치게 되므로… 이것도 천운인가 한다."

고통스런 하루하루가 이어졌지만, 이 선생은 자서전에서 모든 걸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승철/경남대 교수(이극로 선생 후손)] "(일제로부터) 온갖 악행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고향 마을에 조그마한 기념관이라도 세워져서 그분의 뜻과 업적이 알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월북하면서 선생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고영근/이극로 박사 기념사업회장] "독립 행적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걸 알리고 또 이극로 박사가 한글 운동에 선두 주자였다는 것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일대기를 담은 전집 발간은 십여년이나 미뤄졌고, 조선어학회 활동을 함께 했던 최현배, 정인승 선생 등과는 달리 고향인 경남 의령에는 아직 작은 기념관조차 하나 없습니다.

MBC 뉴스 서창웁니다.

(영상취재: 손원락(경남) / 영상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서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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