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시선] 거리의 '실질 심사' 자초한 명재권 판사

박재현 2019. 10. 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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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파계승이란 비판 자초
짬짜미 의혹 생기면 신뢰 붕괴
법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 필요
박재현 논설위원
지난 9일 광화문 집회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못지않게 시민들의 분노를 산 인물이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였다. ‘법꾸라지 판사의 분탕질’ ‘정치적으로 편향된 법관’ ‘엿장수 같은 기준으로 구속영장 기각’이란 발언 속엔 명 판사 개인을 넘어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이 배어 있었다. 명 판사가 이날 새벽 조 장관 동생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집회 참석자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법원으로 전선을 넓히게 된 것이다.

조국 수사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거세지면서 우려됐던 심판의 불공정 판정 시비가 현실로 다가온 셈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영장 기각은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사법부의 영장 남발’ 지적과 함께 개혁을 요구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정치적 오해와 불신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혐의 사실을 인정하며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한 피의자에 대한 100% 영장 발부라는 그동안의 통계가 하필이면 조 장관 동생을 계기로 깨진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광범위한 증거 수집을 통해 범죄 사실이 상당 부분 확인됐는데도 혐의를 둘러싼 다툼이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법 논리인가. 돈을 전달한 하수인들은 구속되고 돈을 챙기고 거짓 확인서까지 요구한 주범은 풀어주면서 어떻게 법의 엄격성과 형평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조 장관 가족들에겐 뜻하지 않은 행운이 계속 이어지는 걸까. 많은 시민들의 의문 속에 이 정부의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됐다.

물론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의 표시가 사법부의 심사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될 것이다.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설명. “통상적인 판사는 사건을 판결할 때 이념과 정파를 고려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사회적·정치적 동기에 따른 이념 대립을 상관하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 자기 사건의 결론을 준비한다. 때문에 국민정서법이나 정치적 영향력 등으로 압박하면 할수록 정상적인 판사는 반감을 더 심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

명 판사도 압박에 따른 반감이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 그가 보였던 영장 발부 행태를 보면 꼭 “그렇다”고 말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법농단사건과 관련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은 허용했다. 하지만 조국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선 모조리 영장을 기각했다. 왜 하필이면 이 정부와 이념의 궤를 같이하는 적폐사건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나. 적폐사건 때의 사회적·정치적 압박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걸까.

판사의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사법부가 내세우는 것은 법, 원칙, 양심 등 순결한 단어들이다. 여기서 법과 양심을 관통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소신과 신념일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상식적으로 잘못됐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복잡한 법 이론과 체계를 들고나와 “무식한 것들이 뭘 알아”하며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국민들을 업신여기는 것 아닐까. 법관의 양심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로 “뭘 좀 알고 말해”라고 할 때 국민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존재로 있어야만 할까.

검사들이 작성한 조서만으로 피의자의 신병을 처리하는 것은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취지에서 1997년부터 시작된 영장실질심사제도가 23년째 접어들었다. 90%대에 이르던 영장발부율이 70~80%로 내려오면서 법원이 인권 보호와 불구속 수사 원칙을 지키려 한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3~4명의 영장 판사가 피의자 운명을 쥐락펴락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제도 개선을 위한 주문도 잇달았다. 특히 정치적 사건이나 권력형 비리 사건을 둘러싼 형평성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권위주의 정부 때 영장을 청구한 검사와 당직 판사가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영장 심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법대 출신에 같은 사법연수원을 나와 짬짜미 형태로 영장을 발부하던 야만의 시대를 우리는 기억한다. 고집불통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영장을 청구한 검사 대신 정치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해 또 다른 결탁이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이제 법원의 사법심사에 대해서도 민주적 통제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 왔다. 우리나라 법조인들이 존경하는 김병로 선생처럼 ‘길거리의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갈망을 법원이 현학적인 법 논리로 외면해선 안 될 일이다. 법원의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던 영장전담 판사들이 법원의 파계승으로 오해받고 있다. 조국 사건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문제이지, 현란한 법철학이나 궤변의 영역이 아니다.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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