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법원이 '키다리 아저씨'?

양은경 사회부 법조전문기자 입력 2019. 10. 11. 03:14 수정 2019. 10. 1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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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경 사회부 법조전문기자

구속영장 실질 심사 법정의 판사 앞에는 두꺼운 수사 기록이 놓여 있다. 절도 같은 간단한 사건도 내용이 만만치 않다. 도둑질이 한둘이 아니라는 전과 내역, 훔친 물건을 적은 압수물 목록, 엄벌을 원한다는 피해자의 진술 조서, 범행 일시와 방법, 장소를 상세히 자백한 피의자 신문 조서까지 모두 검찰이 구속을 주장하며 낸 증거물이다.

이에 맞서는 변호인과 피의자는 거의 빈손이다. 대개 실질심사 일정은 급하게 잡히기 때문에 수사 서류를 입수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법정에서 판사를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 죄를 인정하면 "구속 시 가족 생계가 곤란해진다"고, 부인하면 "방어권 보장을 위해 풀어 달라"고 호소한다. 때론 '복장 전략'도 쓴다.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거나 학생은 교복을 입는 식으로 '나는 구속되면 안 된다'고 온몸으로 읍소하기도 한다. 그 결과 기각되는 비율이 20% 남짓이다.

그래서 영장 실질 심사 포기는 그 자체로 구속을 각오한 행위다. 피의자가 검찰의 구속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 실질 심사에 불출석한 피의자에게 100% 영장이 발부됐다는 통계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영장 실질 심사를 포기한 조국 법무부 장관 동생 조모씨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는 소식은 판사들에게도 충격이었다. 한 판사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30년 전에 친구와 싸운 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건에서나 가능한 결과"라고 했다. 수사 서류 내용 자체로 처벌이 불가능한 사안임이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 기록을 보고 구속 필요성에 의문이 들면 법원이 어떻게든 피의자를 불러서 심문을 하는 게 맞는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이 그랬다. 현재는 실형이 확정된 상태지만, 지난해 구속영장 청구 당시 그가 실질 심사를 포기했는데도 법원이 불러 심문했다. 그리고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법원은 조씨를 부르지도 않고 영장을 기각했다. 그러면서 "범죄 성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으며 이미 광범위한 증거 수집이 이뤄졌고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조씨의 '건강 상태'까지 고려했다. 한 판사는 "이쯤 되면 법원이 거의 '키다리 아저씨'"라고 했다. 미국 작가 웹스터의 소설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는 부모 없는 소녀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소녀를 돕는 후원자다. 그만큼 이 사건에서 법원이 먼저 나서서 조씨를 챙겨 준 것 아니냐는 말이다. 소년범 사건에선 법원이 때로 후원자 역할을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권력 실세와 그 친인척에게까지 그런 역할을 하는 법원은 사법 불신을 낳는다. 돈과 권력으로 '키다리 아저씨'를 가질 수 없는 서민들은 앞으로 법원 판결을 더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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