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8차 옥살이 윤씨 "체모 뽑아줬더니 현장서 내것 나왔다더라"

박사라 2019. 10. 1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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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다리 불편한데 쪼그려뛰기도 시켜
현장 검증도 경찰 각본대로 진행
돈보다는 명예 찾고 싶을 뿐"
당시 경찰 "가혹 행위 없었다"

“(나를 고문한) 형사들에게 묻고 싶어요. 정말로 내가 범인이고 자신들은 당당한지. 양심이 있다면 진실을 말해달라고요.”

11일 청주에서 만난 윤모(53)씨는 약 1시간 30분 동안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8차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 간 옥살이를 했다.

최근 화성 사건 용의자 이춘재가 이 사건이 자신의 소행이라 주장하면서 그는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윤씨는 “솔직히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8차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을 감옥에서 지낸 윤모씨가 11일 중앙일보 기자와 만나 당시 상황을 자세히 증언했다. 박사라 기자.

Q : 1988년 9월 사건이 발생했고, 89년 7월 체포됐다. 당시 상황 설명을 해달라.
A : 사건 당일 집에서 자고 있었다. 체포 됐을 때는 회사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경찰이 갑자기 와서 잡아갔다. 지서(당시 파출소를 부르던 말)로 잠깐 들렀다가 야산으로 데리고 가더라. 깜깜한 가운데 형사들과 봉고차를 타고 올라갔고, 거기서 형사가 몇 마디 했던 기억이 났다. 이후 다시 경찰서로 가서 사흘 내내 조사를 받았다.

Q : 당시 5~7시간 만에 자백했다고 알려졌다.
A : 아니다. 사흘 동안 잠도 안 재우고 조사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게 아니다’고 하니 주먹으로 맞고 발로 차였다. 쓰러진 뒤에도 뺨을 맞았고 다리가 불편한데 쪼그려뛰기도 시켰다. 형사가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고 겁을 줘서 자백했다. 거기(경찰서)서 죽어나간들 신경도 안 쓰는 시대였다.
윤씨는 자신을 고문한 형사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자가 당시 수사팀 사진을 보여주자 “이 사람은 A형사인데 나를 고문한 적이 없다”는 말도 했다.

Q : 당시 형사들은 가혹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A :나도 보도를 봤다.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그 당시 수사가 당당했는지. 양심이 있다면 진실을 말해줬으면 한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실제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 사진은 과거 경찰이 만든 화성 사건 용의자의 몽타주 모습. [연합뉴스]

Q : 2차 현장 검증 당시 높은 담벼락을 한 번에 훌쩍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A : 잘못 알려졌다. 당시 수사기록에는 담을 넘었다고 돼있는데 나는 담을 넘지 않았다. 넘는 시늉만 했다. 그것도 형사들이 뒤를 받쳐줘서 가능했던 거라고 친척들에게 들었다. 그 시절 시골집 담들은 비가 오면 흔들거렸다. 내가 그 당시 담을 잡았을 때도 (담이) 흔들거렸다. 내가 만일 담을 실제로 넘었으면 나도 같이 (떨어져서) 가버리지 않았겠나.

Q : 현장 검증은 어떻게 진행됐나.
A : 경찰이 각본 짜서 했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시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를 세뇌 시킨 것 같다. 나도 겁 먹으니까 (허위 진술이) 나오더라. 내가 피해자 방 위치를 정확히 지목했다는 보도가 있던데, 나는 그 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피해자 오빠랑 친구 사이라는 보도도 있지만 실제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동네가 좁고 시골에서는 2~3년 연차 나이끼리 친구 먹으니까 봤었을 법도 하지만 누군지도 기억이 안난다.

Q : 피해자 방에서 본인의 체모가 나온 부분은 어떻게 보나. 경찰 조사 초기에 본인이 범행을 부인했더니 거짓말 탐지기에서 ‘거짓’ 결과가 나왔다고도 알려졌다.
A : 생각해 보시라. 가본 적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체모가 나오나. 내가 아는 건 당시 체포 직전에 5~6번 정도 체모를 뽑아 줬던 것 뿐이다. 경찰 조사 당시 내 체모에서 티타늄 성분이 나왔다거나 자세한 분석 결과는 듣지 못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 역시 한 20분 간 받았는데 정작 나는 결과를 듣지 못했었다.

Q : 1심 재판에서는 범행을 시인했다가 항소심부터 이를 부인했다.
A : (구속돼서) 구치소에 있을 때 선배들(윤씨는 교도관과 수형자를 이렇게 불렀다)이 ‘넌 무조건 사형이다’고 하더라. 사형제도도 있었던 시절이고. 검사도 ‘넌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라고 해 사형은 면해보려고 1심에선 시인했다. 그런데 2심에서는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담당 최모 검사한테 재수사를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검사만 잘못된 걸 바로잡아줬어도 난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그 검사한테도 자신이 지금 변호사로서 당당한지 묻고 싶다.

Q : 변호인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했나.
A : 당시 친척이 변호인을 선임하려 하니까 그 때 돈으로 1500만원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그 돈이 어디 있나. 하는 수 없이 국선 변호인을 썼는데 변호인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결심 때만 와서 ‘선처해달라’고 한 게 전부인데 잘 들리지도 않았다.

Q : 교도소 생활은 어땠나.
A : 재심을 하려고 했지만 주위에서 안 된다는 얘기만 들었다. ‘내가 계속 살아야 하나, 죽으면 편할 텐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5명의 선배(교도관)들 때문에 살 의지가 생겼다. 그 중에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나에게 ‘죽을 바에야 살아서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다른 교도관들도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했다. 그 덕에 사고 안 치고 교도소에서도 1급 모범수로 가석방될 수 있었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난 이 세상에 없었을 거다.
윤씨는 재심 무죄 판결을 끌어낸 경험이 있는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돈보다는 명예를 찾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한편 중앙일보는 ‘최 검사가 재수사 요청을 무시했다’는 윤씨 주장에 대해 최 변호사 사무실에 입장을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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