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⑫日수탈기관 폭탄 던진 나석주..최후까지 '민중의 분투' 촉구

김성진 입력 2019. 10. 13. 11:29 수정 2019. 10. 1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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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나석주(羅錫疇, 1892~1926) 의사. 2019.10.13 (사진=의열단 100주년 추진 기념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우리 2000만 민중아! 나는 2000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했다. 2000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조선인은 일제 경찰들과 총격전 속에서 이 같이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평생 조국의 자유를 위해 치열히 투쟁하며 마지막 최후의 순간 2000만 온 민중의 분투를 촉구한 그는 민족혼을 일깨운 진정한 의열남아(義烈男兒) 나석주(羅錫疇, 1892~1926) 의사다.

189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나석주 의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6세 무렵 고향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 보명학교에 입학해 2년 동안 수학하며 신학문을 습득했다.

1912년 20세에는 황해도 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에 입학해 공부했고, 이때 김구 선생과 사제관계를 맺게 됐다.

이듬해 처와 자식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친척 형 나석연이 있던 만주 모아산(帽兒山)으로 갔다. 1915년에는 이동휘(李東輝)가 설립한 왕청현의 나자구(羅子溝) 무관학교에 들어가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다.

그러다 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부로 살고자 했으나, 경술국치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집안의 땅을 일제에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무리한 소작료 인상에 항의했지만 오히려 소작농지마저 박탈당했으며 이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노와 함께 독립운동의 계기가 됐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인근인 황주군 겸이포(兼二浦)로 이사를 간 의사는 쌀가게를 운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아가던 중 1919년 3·1운동을 마주하게 된다.

의사는 김덕영(金德永) 등 동지들과 태극기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3월10일 내종리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됐다.

독립운동사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의사는 이듬해인 1920년 1월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 동지 50명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집 활동과 친일파 처단에 나섰다.

사리원 최병항, 안악 원형락 등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송금했으며, 악질 친일파인 은율 군수를 처단하는 등 크게 활약하다 일제 경찰의 체포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9월 중국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의사는 천진과 상해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사제관계를 맺은 김구 선생과 다시 만나 그가 지휘하던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임명돼 밀정 색출·처단과 임시정부 보호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다 1923년 초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추천으로 정식 군사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의사는 중국 하북성 한단에 있는 한단 군관학교 육군 제1군사강습소 군관단에 입교해 사관 훈련을 수료한다.

다음 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돼 바오딩(保定)에 있는 중국군 공병단 철도대에 배속돼 복무하며 기관사 역무와 수리 등을 비롯해 철도 파괴 등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이후 순덕부(順德府)에 있는 중국군 제1사단 사령부로 보직돼 근무하다 1925년 다시 상해로 돌아와 김구의 지도하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서울=뉴시스】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모습(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26년 봄, 드디어 의사의 운명을 바꿀 만남이 상해에서 이뤄진다.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은 상해에서 김구 선생 등과 만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보내 친일파를 박멸하고 적의 심장부를 격파하자고 제안했다. 김구는 이를 받아들여 나석주 의사와 함께 의열단원 이화익을 적임자로 추천했다.

그 무렵 의사는 임시정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류자명 선생 소개로 약산 김원봉과 만나 천진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의열단에 입단했다. 그는 의열단원으로 폭파활동 및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이윽고 1926년 6월 의사는 천진에 체류하고 있던 김창숙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의사는 김창숙 선생으로부터 경제 침탈의 총본산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해 일제의 침탈을 응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말을 듣는다.

의사는 김창숙, 유우근, 한봉근, 이승춘 등 동지들과 거사계획을 마련한 후, 그 해 12월 마중덕(馬中德)이란 이름의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뒤 인천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거사가 실행된 1926년 12월28일. 중국인 전용여관에서 일어난 의사는 차가운 겨울 아침바람을 맞으며 서울 한복판을 배회하며 때가 되길 기다렸다.

오후 2시5분 드디어 정의로운 거사가 시작됐다. 나 의사는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으로 이동했다. 이어 오후 2시15분께 여러 명의 일본인들을 총격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이 역시 불발했다.

이후 다시 일본인들에게 총을 쏘고 몸을 피하던 의사는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거리에서 추격해 오던 일제 경찰들과 교전하며 대치하게 된다.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의사는 외쳤다. "우리 2000만 민중아! 나는 2000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했다. 2000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의사는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 등의 숨통을 끊고 남은 탄환으로 자결을 시도했다.

의사는 총상을 입고 일제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돼 고등계 미와 와사부로 경부에게 심문을 받던 중, '황해도 재령의 나석주이며 의열단원'이라고 밝히고 4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정부는 1962년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99년 11월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의거 장소(현 서울 중구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 '나석주 열사의 상' 동상이 건립됐다.

ksj8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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