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돈·기업 한국 떠난다]"한국선 재산 못지켜" 자산가들 이민 간다

염지현 입력 2019. 10. 14. 05:00 수정 2019. 10. 14. 07:1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불안하고 정책엔 불만
투자이민 설명회 문전성시
말레이시아 장기비자 작년 1500건
"상속하려면 현금 수백억 필요"
회사 국내 놔두고 가족들과 이민
요트 선착장 뒤로 30층 짜리 고급 콘도들이 들어선 말레이시아 최남단 조호르바루의 신도시 푸트리 하버. 염지현 기자

지난 3일 말레이시아의 최남단 조호르바루(Johor bahru)의 신도시 푸트리하버. 조호르 해협 너머로 싱가포르가 보인다. 싱가포르를 마주보는 해변을 따라 30층짜리 콘도 공사가 한창이다. 관광지도 아닌데 한무리의 한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현지 답사를 온 이민 준비생들이다. 해외 이주 전문업체 유원인터내셔널의 조현 대표는 “한 달에 30~40명이 거주 환경이나 살 집을 알아보기 위해 사전 답사를 온다”며 “10년짜리 장기비자 신청 건수가 지난해 1500건으로 1년 사이 두 배 늘었다”고 말했다.

조호르바루에서 사업을 준비 중인 유모(37)씨는 “다른 동남아 국가와 달리 100% 법인 지분 소유를 인정해주는데다 사업 투자 비용이 적어 카페 사업을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 안되면 이자소득세가 없는 은행 예금에 넣어둬도 약 4%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면서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는것보다 돈 벌 기회는 더 많다”고 말했다. 40대 사업가 이모씨는 “한국에서 인건비와 각종 세금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면서 “(말레이시아는) 상속ㆍ증여세도 없어 한국에 남겨둔 재산도 차차 정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자들 '보험가입' 하듯 이민 티켓 구입
투자자와 이주자가 몰리면서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곳곳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주상복합 R&F 프린세스 코브 너머로 싱가포르가 보인다. 조호르 해협을 가로지르는 육교(오른쪽)를 통하면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염지현 기자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과 사회 불만으로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민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서울강남권을 중심으로 열리던 투자이민 설명회는 부산과 제주도에서도 열리고 있다. 문전성시다. 2019년을 강타한 이민 붐은 한국 사회에 번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김인응 우리은행 영업본부장은 “자산가들은 최근 한국 경제나 정부 정책의 흐름을 봤을 때 시간이 갈수록 ‘내 재산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면서 “(이들은) 유사시 언제든 삶의 터전을 옮길 수 있게 영주권을 따려고 한다”고 말했다. 마치 보험 가입하듯 이민 티켓을 사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 비자 발급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투자이민 비자를 발급받은 한국인은 1년 전보다 배이상 늘어난 531명이다. 한국은 중국, 베트남, 인도에 이어 투자이민 발급 국가 4위다.


기업체 사장도 짐싸면서 일자리 부족, 경제는 악순환
미국 투자이민 비자 발급 많은 국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민 행렬에 불을 당긴 건 기업체 사장도 짐을 싸면서부터다. 일부는 팍팍해진 회사 살림에 보다 임금이 싸고 관세 혜택이 있는 동남아로 떠밀리 듯 공장을 옮긴다. 공장 이전이나 폐쇄는 다시 국내 일자리 축소로 이어진다. 경제의 악순환이다. 대기업도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넓히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하지만 저출산, 고령화에다 각종 규제에 발묶인 한국 시장의 투자 매력도가 낮아진 탓도 크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이달 들어 고객 중 사업가 4명이 미국 투자이민을 신청했다”면서 “자녀를 유학을 보내더라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에 남아서 회사를 경영했던 과거와 달리 사업체를 정리하거나 해외로 이전하려는 CEO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최저임금 인상에도 52시간 근무시간 단축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지니 더 이상 버티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다”고 들려줬다.

자동차부품기업을 운영하는 이영호(가명) 회장은 지난해 사업체는 국내에 놔둔 채 가족과 싱가포르행을 택했다. 지난 30년간 기업을 키웠지만 가업승계에 골머리를 앓다가 개인적으로 내린 결단이다. 이 회장은 “가업상속공제 요건은 까다롭고 상속을 하려면 수백억원의 현금이 필요했다. 세금 스트레스로 건강까지 나빠져 기업도 포기하는 심정으로 한국을 떠나와 있다"면서 "앞으로 한국에 있는 회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세금 낮고 물가 저렴한 말레이시아가 '틈새 이민지'로 각광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국을 떠난 삶은 어떨까. 올해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로 이사 온 박상우(39)ㆍ유지희(37) 부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싱가포르 생활권을 누리면서 집값 등 물가는 훨씬 저렴해 한국에 사는 것보다 삶이 풍요로워졌다”면서 “특히 국제학교 학비가 평균 1000만원 수준으로 저렴해 자녀 교육 부담이 적다는 데 만족한다”고 들려줬다.

말레이시아는 선진국 투자이민에 비해 투자금, 투자요건 등의 문턱이 낮아 틈새 이민지로 뜬다. 만 50세 미만 기준으로 50만링깃(약 1억4000만원) 이상 자산과 부부합산 1만링깃(약 280만원)이상 월 소득을 증빙하면 ‘말레이시아, 나의 두 번째 고향 비자‘(MM2H)을 신청할 수 있다. 10년마다 연장이 가능해 영주권에 준한다. 오현식 전 조호르한인회장은 “살기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조호르주에만 약 5000명의 교민이 있다”면서 “5년 사이 적어도 3000명은 늘었다”고 말했다.

조호르바루 인공 섬 위에 건설된 주택 단지 포레스트 시티 모델하우스는 방문객으로 붐빈다. [연합뉴스]

조호르바루에 사람이 몰리면서 바닷가를 따라 수십 개의 고급 콘도가 세워지고 있다. 해변 땅이 동나자 인공섬 위에 건설된 주택 단지 포레스트 시티까지 등장했다. 수영장, 쇼핑몰 등 부대시설을 갖춘 콘도 가격은 3억5000만원(27평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보다 저렴하다. 아파트 R&F 프린세스 코브 시행사인 R&F그룹의 영업담당자 벨린다 테는 “현재까지 7000세대를 분양했는데 이 중 5%가량은 한국 거주자를 포함해 중국ㆍ싱가포르에 사는 한인 교포가 구입했다”고 말했다.


엑소더스 막으려면 '사람과 기업이 살기 좋은 환경'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사람과 기업, 자본이 빠져나가는 ‘코리아 엑소더스’ 현상에 대해 급격한 한국 사회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국 표현으로 정책이 나오면 대책이 나온다는 의미로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 下有對策)’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며 “고액 자산가와 기업들이 이번 정부 들어 정책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이 나빠졌다고 판단하고 ‘글로벌’과 ‘다변화’ 로 탈출구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실 한국경제학회장(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은 “경상수지 흑자가 20년 동안 지속되면서 자본이 충분히 쌓이니까 국내에 마땅히 투자할 곳이 사라졌다”며 “국내 투자를 해봐야 그만한 수익률도 나오지 않으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윤창현 교수는 해법으로 “‘유턴’이 필요하다”며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을 쓰고, 경제적으로는 반기업 정책을 거둬들이는 모습만 보여도 떠나는 사람과 기업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염지현 기자, 강광우 기자 yjh@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