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면하려 범행 시인.. 검사에 재수사 요청했지만 묵살당해"

김을지 2019. 10. 1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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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8차 사건' 20년 옥살이 윤모씨 인터뷰 / 가혹행위 없었다던 형사들에게 / 수사 당당했는지 진실 묻고싶어 / 체모 뽑아줬더니 증거로 '둔갑' / '티타늄 분석' 당시 듣지도 못해 / 국선변호인 재판때 얼굴 처음봐 / 이춘재, 이제라도 범행 자백 다행 / 솔직히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 경찰, 李 '화성 피의자' 정식 입건

“이춘재 때문에 감옥 생활을 했지만, 그가 범행을 이제라도 솔직히 고백해줘 고맙다. 경찰의 잘못된 조사를 바로잡을 희망을 갖게 됐다.”

화성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간 옥살이 한 윤모(52·사진)씨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8차 사건은 박모(13)양이 1988년 9월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한 주택에서 잠을 자던 중 살해된 사건이다. 7차 사건 발생 이후 9일 만에 발생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모방범죄로 결론 내리고 범인으로 박양 오빠의 지인으로 추정됐던 윤씨(당시 22세)를 검거했다.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법원까지 상고했으나 형을 확정받았다. 19년 6개월간 복역한 윤씨는 2010년 감형받아 출소했다.

화성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간 옥살이를 한 윤모씨가 14일 청주 한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과거 경찰의 잘못된 조사를 바로잡아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14일 충북 청주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다리가 불편했는데 깔끔한 얼굴로 2시간여 기자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답했다. 그는 화성사건 용의자 이춘재가 ‘8차 사건은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뒤 재심 준비를 하고 있다.

윤씨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감옥 생활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며 “그래도 이춘재가 범행을 고백해 재심을 준비하게 돼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씨는 사건 당시에 대해 “농기계센터에서 일한 나는 사장님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경찰이 와서 ‘물어볼 게 있다’며 잡아갔다”면서 “파출소(당시는 지서)에 잠깐 들른 다음 경찰서에서 사흘 동안 잠도 못 자고 조사를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게 아니다’고 하니 경찰이 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내가 쓰러지자 뺨을 때렸다. 나는 다리가 불편한데도 쪼그려뛰기까지 해야 했다”며 “형사가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고 겁을 줘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형사들이 가혹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말에 “그 사람들에게 정말로 그 수사가 당당했는지 묻고 싶다. 양심이 있으면 진실을 말해달라”고 강조했다.

윤씨는 2차 현장검증 당시 높은 담벼락을 한 번에 훌쩍 넘었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나는 담을 넘지 않았다”며 “벽돌을 밑에 두고, 형사들이 뒤를 받쳐줘서 가능했던 거라는 말을 친척들한테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시절 시골집 담장은 두꺼운 합판처럼 돼 있어 비만 와도 흔들거렸다”며 “내가 담을 잡았을 때도 흔들거렸으며, 담을 넘으려 했으면 나도 담장과 함께 넘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장검증에 대해서는 “겁을 먹으니까 (허위 진술이) 나오더라”며 “내가 피해자 방 위치를 지목했다는 보도가 있던데, 그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 오빠랑도 전혀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며 “동네가 작고 시골에서는 2∼3년 연차 나이끼리 친구 먹으니까 봤을 법하지만 누군지도 기억 안 난다”고 밝혔다.

윤씨는 피해자 방에서 자신의 체모가 나왔다는 부분과 거짓말 탐지기 결과에 대해 “가본 적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체모가 나오냐”고 반문한 뒤 “당시 체포 직전에 체모 5∼6개를 뽑아줬던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 체모에서 티타늄 성분이 나왔다는 자세한 분석 결과와 거짓말 탐지기 조사 결과에 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1심 재판에서 범행을 시인했다가 항소 때부터 부인한 이유에 대해 그는 “구치소에 있을 때 교도관과 수형자들이 ‘넌 무조건 사형’이라고 했다”며 “검사도 ‘넌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라 해 사형은 면해보려고 1심에선 시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심에서는 이건 아니다 싶어 담당 최모 검사한테 재수사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친척이 변호인 선임을 알아보니 그때 돈으로 1500만원이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다”며 “국선변호인을 썼는데 변호인 얼굴은 본 적도 없고, 결심 공판 때 와서 선처해 달라고 한 게 전부”라며 한숨 쉬었다. 그는 “교도관들의 희망을 가지라는 조언 때문에 삶의 의지가 생겼고 1급 모범수로 가석방될 수 있었다”며 “돈보다 명예를 찾고 싶을 뿐”이라 강조했다. 윤씨는 재심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경험이 있는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한편 경기남부경찰청은 최근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를 이 사건의 피의자로 정식 입건했다. 화성사건은 공소시효가 모두 끝나 이씨에 대한 입건이 처벌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이씨의 신분이 용의자에서 피의자로 전환되면서 향후 신상공개 가능성이 열렸다. 이씨는 10여 차례 이어진 경찰의 대면조사에서 10건의 화성사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강간미수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씨가 자백한 모든 사건의 피의자인지 이 가운데 일부 사건의 피의자로만 입건됐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청주=김을지 기자 ej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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