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초장시간 노동은 살인이다!

2019. 10. 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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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한국적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노르웨이 학교들의 교사 부족 현상이다. 한국의 지난해 공립 중등교사 임용시험 경쟁률은 국어나 영어 같은 과목의 경우 무려 25 대 1이나 되었다. 노르웨이는 반대로 학교들이 교사를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도 정원에 비해 약 1천명의 교사가 부족하고, 20년 뒤에 약 5500명의 초·중학교 교사가 모자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교사가 될 예정인 교육학부 학생들의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주고 사범교육 인식 제고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교사가 되려는 사람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노르웨이 신문에 ‘교사 채용 위기’와 같은 기사 제목이 보일 때 이는 임용고시생 사이의 과도한 경쟁이 아니라, 지원자가 없어서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칠 사람을 뽑지 못하는 학교 쪽의 애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교사라는 직종을 애써 기피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학교 대부분이 공립인 만큼 교사는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 신분인지라 임금 수준부터가 그다지 높지 않다. 노르웨이에서 고등학교 교사들의 평균 한달 벌이는 한국 돈으로 700만원 정도 되겠지만, 이는 노르웨이 직장인의 평균이면 평균이지 그 이상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임금은 ‘별로’인데 신경은 신경대로 쓰이는 게 교사라는 직업이다. 학생들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 학교 쪽이 막중한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된 직업이긴 하지만, 굳이 그런 직업이 아니더라도 실업자가 된 사람에게는 어차피 복지사무소가 다음 직장을 구해주거나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곳이 노르웨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다루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굳이 학교에 취직하려 하지 않는 것이 노르웨이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 갈수록 ‘임금 액수’가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더 중요해지는 사회에서,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더 드물어져서 문제다.

한국이라고 해서 임금 액수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개개인의 임금 이외의 사회 임금, 즉, 복지제도를 통해 받는 돈이 노르웨이보다 훨씬 적어서 오히려 그만큼 임금 액수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이라고 해서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준공무원의 임금이 꼭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교사를 비롯한 각종 공무원 취직이 만인의 꿈이 된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그 밖의 거의 모든 직장에서는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잔업 같은 초과근무가 일상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는 부서 책임자들을 빼고는 직장인 대부분이 ‘칼퇴근’을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통 ‘칼퇴근’해도 되는 교사는 많은 이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교사라고 해서 절대로 (일이) 편한 직업은 아니지만, 다른 직업들이 특히 장시간 노동 강요라는 차원에서 개개인의 심신에 훨씬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는 만큼 교사라는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보통 근대인은 자신의 개인적 ‘삶’을 살기 위해 ‘일’을 한다. 물론 작가나 연구자, 정치인 같은 일부 직종의 경우에는 ‘일’이 바로 ‘삶’이 되지만, 생활인 다수가 ‘일’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적으로 불사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은 ‘삶’의 전부를 식민화하여 개인에게 가정이나 자신을 위해서 살 시간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사실 교사라고 해서 ‘일’이 개인이 누려야 할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도 아니다. 8년 전에 경상남도의 한 신문에서 그쪽 교사들의 근무 실태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 느낀 놀라움을 생생히 기억한다. 도교육청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11시간 정도였고, 11%는 주당 26시간 이상의 수업을 해야 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아마도 부당노동행위 관련 소송으로 이어졌을 법한 일이지만, 한국에서 이런 보도를 보고 나처럼 놀라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른 직종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용어를 쓰면 교사와 같은 공무원 신분의 고학력 정규직 피고용자들은 ‘핵심부 노동자’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핵심부 노동자’도 종종 과로사를 당하곤 하지만, 대부분 ‘주변부 노동자’, 즉 저임금 일자리에 취직해 신분적 불안을 늘 느껴야 하는 저학력 노동자들이 훨씬 더 과로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교사들도 고생이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주변부 노동자들은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죽음의 위험을 일상적으로 실감할 정도다.

4년 전 광주에서 한 학교 야간 당직 기사가 과로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들 쉬는 광복절 이튿날에 숨을 거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내리 73시간(!)을 일하다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것이었다. 인명 사고가 난 만큼 일부 언론이 잠시나마 전국적으로 약 8천명에 이르는 각급 학교 야간 당직 기사의 상황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평일에는 16시간씩 일하고 휴일에는 계속 당직 근무를 한다. 1년으로 치면 6000시간 정도 되는데, 이건 1960년대 말 평화시장 여공의 평균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월급은 100만원 정도로, 단순 생존도 어려운 수준이다. 평균나이가 70살인 기사들은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버틴다.

그러나 이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가 사고가 잊히고 나서는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이윤 창출, 누군가의 편의와 안락을 위해서 계속 희생되어야 하는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이 사회의 주류는 도무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류가 아무리 외면해도 반세기 전 평화시장 수준의 노동 참사는 이 나라의 일상이다. 단, 노동자를 과로사의 위험에 빠뜨리는 초장시간 근로는 더 이상 방직업과 같은 업종도 아니다. 반세기 전, 방직업이 수출의 주력 업종이었기에 방직공장 여공들은 밤샘 노동을 밥 먹듯이 강요당했다. 이제는 외국에서 척척 잘 팔리는 한국 드라마나 컴퓨터 게임 등이, 급할 때는 철야 근무를 밥 먹듯 해야 하는 촬영팀이나 개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의 수출 경쟁력을 보장하는, 한국을 지금과 같은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노동자들은, 과연 언제까지 과로사 위험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할까?

지금 많은 사람이 외치는 검찰개혁만큼이나 초장시간 노동의 악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나는 그래서 정부 쪽이 최근에 언급한 ‘주 52시간 초과근로 금지 제도의 확대 시행 유예 방안’이 이 정권의 ‘개혁’ 명분을 무색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변부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과로사 위험을 실감하면서 일해야 하는 판에 ‘개혁’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의 식민지가 된 개개인 ‘삶’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의 핵심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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