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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천리장성은 어디에 있었나?

임기환 입력 2019. 10. 1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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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81] 631년(영류왕 재위 14년) 2월에 고구려는 영류왕은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봄 2월에 (영류)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1000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그런데 위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에 전하고 있다. 다만 중국측 기록에는 단지 631년(영류왕 재위 14년)에 시작되었다는 언급만 있을 뿐, 2월에 장성 축조가 시작되었다는 내용, 그리고 장성 공사가 16년 걸렸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유사' 기사에서도 천리장성 공사가 16년이 걸렸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고구려측 독자의 전승 기록임이 분명하다. 사실 '삼국사기' 위 기사도 국내 전승 내용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중국측 사서에 의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당이 경관을 파괴하자 고구려가 장성을 쌓았다는 중국측 역사서 내용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에 의한 경관 파괴는 631년 8월에 있었던 일로서, 고구려는 그보다 앞선 2월에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즉 당에 의한 경관 파괴가 천리장성 축조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지난 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631년 2월에 당태종이 수나라 전사자들에 대한 수습책을 다시 지시한 바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도 자신 세운 경관을 파괴하려는 당의 움직임을 미리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경관 파괴란 단지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일뿐, 이미 그 이전부터 당태종이 고구려에 대해 심상치 않은 태도를 갖고 있음을 고구려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천리장성의 축조가 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고구려의 방어책이고, 이런 고구려의 움직임에 대해 당 또한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천리장성 축조 기록을 시시콜콜히 살펴보는 이유는 이처럼 문헌 기록상으로는 천리장성의 존재가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지만, 정작 1000리나 되는 장성 유적은 그 실체가 불분명해서다.

앞의 기록을 다시 보자면, 고구려 천리장성은 ① 631년 2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16년이 걸려 완공하였다. ② 동북쪽으로 부여성에서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③ 장성의 길이가 1000여 리이다. 이런 내용이 고구려의 자체 전승만이 아니라 중국측 기록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더구나 천리의 길이라면 요새 미터법으로 환산하자면 500㎞에 해당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416㎞이니 이보다도 더 긴 장성이다.

그런데 문헌 기록대로라면 이처럼 거대한 천리장성 유적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데, 정작 학계에서는 장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찌 문헌 기록을 다시 한번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현재 천리장성이 어디에 있는지, 그 성격이 무엇인지를 두고 제기되고 있는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천리장성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크게 보면 둘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그동안 가장 널리 거론되었던 견해로서 기존에 요하와 천산산맥 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산성들을 장성으로 연결하였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1970년대 이후 중국에서 요하 일대에서 토축으로 이어지는 변강(邊崗) 유적을 발견해 조사함에 따라 이렇게 이어지는 변강유적을 고구려의 천리장성으로 보는 견해이다.

산성연계장성설과 변강유적 장성설 / 정원철, 『고구려 산성 연구』(2017,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인용함.

첫 번째 견해는 위 기록대로 북쪽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와 수,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방어 요충성인 신성, 요동성, 개모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 등 고구려 방어선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크고 작은 산성들을 연결하여 장성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견해는 실제로 그 많은 산성 등을 연결하는 장성 유적이 현재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최진보산성이나 서풍 성자산산성 등 일부 산성의 경우에는 본성에서 외부로 뻗어있는 토벽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여 이를 장성 유적의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들 산성 외곽에 추가된 성벽 유적은 산성 자체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추가 방어시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으로 당과 전쟁을 다룰 때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요동의 산성 유적을 일부라도 답사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대형 산성의 경우에는 산성 하나하나가 다 독립적으로 완결된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산성을 연결하는 방어용 장성을 구축한다는 것이 오히려 병력을 분산시켜 방어력을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구려 산성이 갖고 있는 입지를 고려하면 산성과 산성을 성벽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굳이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겠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요하 변을 따라서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는 변강 유적을 천리장성으로 보는 견해를 살펴보자.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변강 유적이 요하를 건너는 것을 방어하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또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유적들의 축조 방식과 형태가 동일한 상황을 보이고 있으며, 길림성 눙안(農安) 일대에서 요하 하구인 잉커우(營口) 일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변강의 방향이 문헌기록에 보이는 천리장성의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현재까지는 이 변강 유적을 제외하고는 천리장성에 비정할 수 있는 다른 유적을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한때 유력한 견해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 변강 유적을 과연 장성 유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도 조사자마다 판단하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듯이, 현재 남아 있는 이른바 변강 유적의 상황으로 보아 장성 일부로 보기 어려운 면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도 20여 년 전에 일부 변강 유적을 답사한 바 있는데, 그 때에 관찰한 바로도 변강 유적을 곧바로 장성 유적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 근래에 변강 유적을 답사한 일부 국내 학자나 중국 학자들도 이를 바로 고구려 천리장성 유적으로 보는 데에 회의적인 의견을 내고 있다.

설상 변강 유적을 장성 유적의 일부라고 보더라도 문제는 그것이 고구려 때 축조되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이 견해의 주장자들도 단지 고구려 외에는 이런 장성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개연성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변강 유적들이 경작지로 개간되었거나 도로로 사용되면서 훼손이 심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고구려 때 축조되었음을 보여주는 고고자료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점이 가장 유력한 반론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반론의 논거로 그 실제 기능 여부가 거론된다. 즉 645년 당태종의 침공 때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도 당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데 장성이 어떤 방어 기능을 하였다는 흔적을 문헌상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문헌 기록으로는 당태종의 침입 때 각 성 단위로 방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 유명한 안시성 전투가 대표적이다. 결국 고구려가 16년이라는 오랜 기간 수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서 무용지물 장성을 쌓았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새로운 시각에서 천리장성의 축조를 접근하는 견해도 있다. 즉 당군이 중장기병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으로 주력군을 재편하는 전술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에서 새로운 방어체계로 축조하였다는 견해이다. 또 당의 조종을 받던 유목민족으로서 기동력이 뛰어난 거란(契丹)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고구려 편에 서있던 말갈(靺鞨)의 이탈을 봉쇄하기 위한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장성을 단지 장벽으로서만이 아니라, 군사상의 정세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전략과 전술의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참신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리장성이 과연 당군과 거란의 침공, 말갈의 이탈에 어느 정도 기능을 수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지금까지 제기된 천리장성의 위치를 둘러싼 두 견해들을 살펴보았는데, 현재로서는 어느 견해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 적지 않은 의문점들을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00㎞에 이르는 16년 동안 축조한 장성인데, 오늘날 이에 해당되는 유적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기에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리라고 본다. 우리가 아는 장성과는 다른 형태의 그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고구려 천리장성은 과연 있었을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회에서는 천리장성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싶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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