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혐오에..침공 지지 논란에..멍들어가는 '축구공 위의 세계'

정환보 기자 2019. 10. 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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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5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불가리아와 잉글랜드의 유로2020 예선전 경기 도중 관중들이 나치식 경례 동작과 손가락 욕설 제스처를 하고 있다.|게티이미지

축구를 축구로만 즐길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2022년 월드컵과 ‘유로 2020’ 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항전이 한창인 세계 곳곳이 축구경기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으로 시끌시끌하다. 논란의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과도한 애국심과 승부욕이 그라운드를 뒤덮으며 생겨난 일들이다.

최근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경기는 지난 15일(현지시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불가리아와 잉글랜드의 유로2020 예선전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4위인 잉글랜드와 62위인 불가리아는 객관적인 실력차가 확연하다. 잉글랜드가 전반에만 4골을 몰아치는 등 실제 경기 양상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불가리아 홈 관중들이 경기 시작부터 잉글랜드팀 주전 흑인 선수들을 향해 ‘원숭이’라고 외쳐대며 원숭이 소리를 흉내내는 등 노골적으로 이들을 조롱한 것이었다. 라힘 스털링, 마커스 래시퍼드, 타이런 밍스 등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주된 표적이었다.

이에 여봐란듯 래시퍼드는 전반 7분 만에 골을 넣었고, 스털링도 이날 2골을 기록했다. 그러자 어느새 관중석 여러 곳에서 원숭이 소리가 울려퍼졌고, 유럽에서 금기시되는 ‘나치 경례’ 제스처에다 영국식 손가락욕까지 등장했다. 장내 전광판에도 이들의 나치 경례 장면이 수차례 등장했다. 잉글랜드 감독과 주장의 강력 항의로 두 차례 중단된 경기는 결국 잉글랜드의 6 대 0 대승으로 끝났다.

경기 종료 후 파장은 일파만파 확대됐다. 추태를 보인 관중과 수수방관한 불가리아축구협회를 향한 비난이 전 세계에서 쏟아졌다. 결국 보이코 보리소프 불가리아 총리가 “인종차별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사과했고, 보리슬라프 미하일로프 축구협회장은 곧바로 사임했다. 불가리아 경찰은 문제의 관중들 가운데 6명을 체포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축구팬들의 인종혐오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잉글랜드·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 ‘전통의 축구 강호’ 국가대표팀 구성이 점점 피부색이 다양해지는 형태로 진화하면서 백인들만으로 이뤄진 ‘약체’팀과의 실력차가 확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유럽 리그에서도 순위가 높은 ‘부자 클럽’일수록 아프리카·중동·아시아 출신 특급선수들을 사들이는 흐름이 강화되면서 ‘약팀’ 팬들의 노골적인 인종혐오 발언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소속 손흥민 선수도 상대팀 팬으로부터 아시아계 조롱의 의미가 담긴 “DVD 좀 구할 수 있느냐” “계란볶음밥 먹었냐”는 ‘혐오 발언’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 11일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스탄불에서 열린 알바니아와의 유로 2020 예선 경기에서 승리한 뒤 단체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터키축구연맹 트위터

직접 경기를 뛴 국가대표 선수들도 논란의 당사자로 떠올랐다. 지난 11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터키와 알바니아의 유로 2020 예선전에서 선수들이 ‘터키 군대식 거수 경례’를 선보인 것 때문이다. 결승골을 넣은 젠크 토순는 골 세리머니로 손끝을 눈썹에 붙이는 ‘군대식 경례’를 했고, 승리 후 선수단 전원이 이를 따라한 사진도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이는 터키의 쿠르드 침공이 한창 국제사회의 비난을 사고 있는 가운데 나온 행위여서 문제가 됐다. 토순은 인스타그램에 경례 사진과 함께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을 위해”라는 코멘트까지 적었다. 터키군 공격에 희생당한 민간인이나 그 가족들에게는 섬뜩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정치적·도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제스처로 보일 여지가 있다”면서 진상조사에 나설 뜻을 밝혔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알바니아계 스위스 선수가 ‘쌍두독수리’ 세리머니를 했다가 벌금을 맞은 바 있다.

지난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대표팀 경기도 ‘희한한 월드컵’ 예선전으로 불리고 있다. 당초 이 경기는 ‘역사적 코리안 더비’로 주목받으며.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평양까지 찾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석연찮은 북한 당국의 방침에 따라 관중도, 중계도 없는 경기로 치러지며 ‘고스트(유령) 더비’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남북 화해·평화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축구로 양측의 적대감만 증폭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같은 정치적 논란을 두고 천문학적 중계권료와 스폰서 수입 등에만 혈안이 된 FIFA가 문제의 근원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인종혐오나 정치적 논란의 위협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돼야 할 FIFA가 사고예방에 소홀했고 늘상 뒷북·솜방망이 징계에 그치다보니 이런 논란이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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