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과 편법이 만든 승강기 잔혹사

반기웅 기자 2019. 10. 19. 17:2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 캠페인단이 원청기업의 무책임에 죽어가는 하청업체 직원의 모습을 행위극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윤중 기자

지난 10월 12일 오전 8시 경기 평택의 한 건물 승강기 설치공사 현장에서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이하 티센코리아) 하청업체 노동자 엄모씨(47)가 추락해 숨졌다. 사고 전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는 승강기 업계의 ‘위험의 외주화’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환노위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양춘 전 티센코리아 대표이사는 잇단 하청노동자 사망사고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의원의 지적에 대해 “모든 과정은 법률자문을 받아서 이뤄진 것”이라며 “전문성을 보유한 업체와 협업하는 것을 위험의 외주화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의 증인심문이 끝나자 국감장에서는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탄식이 나왔다.

지난해 3월 이후 티센코리아 승강기 설치작업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는 엄씨를 포함해 5명에 달한다. 박 전 대표는 국감 이후 또다시 사망사고가 발생하자 10월 14일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티센코리아 대표가 바뀌었으니 노동자들의 작업환경도 나아질까. 불법 하도급으로 얼룩진 승강기산업의 기형적인 구조는 잇단 사망사고에도 바뀌지 않는다. 공사현장 내 불법과 편법 사이에서 반복되는 사고는 여전히 현장 노동자의 몫이다.

숨진 엄씨는 대전 소재 ㄱ업체 소속 노동자다. ㄱ업체는 승강기 설치 전 현장에 작업발판 설치(비계작업)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다. 티센코리아와 계약을 맺고 승강기 설치 전 단계를 시공한다. ㄱ업체 역시 다른 설치·유지보수 업체와 마찬가지로 티센코리아가 평소 관리하는 하청업체다. 채용사이트에서는 ㄱ업체를 승강기 설치·제조업체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 10월 12일 사고 당시 현장에는 엄씨를 포함해 3명의 노동자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2명은 건물 1층에서 자재 관리작업을 하고 있었고 엄씨 혼자 승강로 내부 4층(높이 12m)에서 비계를 설치하다 비계를 떠받치고 있던 부분이 무너져 1층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고 현장에 관리·감독 인력은 없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작업 특성상 관리·감독이 필요하지만 관리자는 없었다”며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관리인력을 두지 않고 공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에는 승강로 바닥에서 2m 위에 설치하도록 한 안전그물망조차 걸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 현장에 관리감독 인력 배치 안해

사고 상황을 잘 아는 승강기 설치업체 관계자는 “엄씨는 보호구를 착용했고 라이프라인에 안전벨트도 했던 것으로 안다”며 “안전장치를 했지만 결속이 안 됐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장 관리자가 문제를 지적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ㄱ업체 노동자들은 왜 서둘러 작업을 해야 했을까. 일반적으로 승강기 설치공사 전 비계작업은 하루 안에 끝내는 게 관행이다. 이들 업체는 사전에 정한 공사 단가를 기준으로 공사 건수에 따라 티센코리아로부터 공사비를 받는다. 건당 공사 단가에는 인건비와 장비임대료, 운반비 일체가 포함된다. 공사기간이 길어질수록 인건비 부담이 커지는 구조다. 이 때문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 빨리 공사를 끝내는 것이 업체 입장에서는 득이다. 임오순 한국승강기공사협회 회장은 “물가나 원자재 가격 변동이 있어도 정해진 단가에 따라 정산받는다”며 “영세업체는 협상력이 없기 때문에 단가는 메이저 제조사 뜻에 따라 정해지는 구조”라고 말했다.

승강기 공사를 총괄하는 주체는 티센코리아지만 티센 측에 사고 책임을 오롯이 물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리모델링 공사는 ㄴ지역 건설업체가 건물주로부터 공사도급을 받아 시공을 맡았다. ㄴ업체는 다시 승강기 설치공사를 떼다가 티센코리아와 설치업체가 만든 공동수급체(컨소시엄)에 도급계약을 맺고 넘겼다. 엄씨가 속한 ㄱ업체 이름은 승강기 설치공사 계약서상에 등장하지 않는다. 컨소시엄에도 포함되지 않은 개별 업체다.

지난 10월 12일 경기 평택시의 한 건물 승강기 설치 현장에서 내부 4층(높이 12m)에 받쳐 놓은 작업발판용 비계가 무너진 모습. 이날 사고로 작업자 엄모씨가 1층 바닥으로 추락해 숨졌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실 제공

불법 하도급에 편법 공동도급 만연

ㄱ업체는 티센코리아와 별도의 하도급 계약을 맺고 승강기 설치공사의 일부를 진행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ㄱ업체의 원청은 당초 승강기 설치공사 일체를 티센코리아에 도급을 준 건설사 ㄴ업체로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사고에 대한 책임은 원청이 지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티센코리아 입장에서는 사고 책임을 원청인 건설사 ㄴ업체로 돌릴 수 있다.

엄씨의 사고 시점도 티센코리아가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번 사고는 승강기가 들어오기 전에 준비작업 중에 발생한 사고다. 때문에 해석에 따라서는 일반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추락사고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체 공사를 담당하는 건설사 ㄴ업체와 사고 책임소재를 두고 다툴 여지가 생긴다.

사고를 조사 중인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일반적인 승강기 작업사고로 볼 수 있는지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며 “티센 측에서 이번 공사를 두고 승강기와 관련이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면 책임 묻기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티센코리아 측은 “다시는 이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프로세스 전분야를 점검하고, 파트너사 등을 포함하여 전사적인 안전 강화조치를 강구하고 있다”며 “계약과 관련한 세부 내용은 당사자 간의 기밀유지 사항으로 알려줄 수 없다”고 밝혔다.

승강기 설치공사는 여러 업체 간 공동도급과 하도급 계약으로 얽혀 있다. 그나마도 구두계약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빈번해 계약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업체도 수시로 바뀐다. 메이저 승강기 제조사들은 복잡한 계약·시공과정을 악용해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난다.

지난 3월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노후 승강기를 교체하던 설치업체 노동자 2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망한 노동자의 소속 설치업체는 티센코리아와 구두상으로 공동도급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공동도급에서는 각 업체가 소속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이 때문에 사고 이후 티센코리아는 해당 업체와 공동도급 관계임을 강조했다. 당시 티센코리아 측은 “사고를 당한 분들은 공동도급 계약을 맺은 설치업체의 직원이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 보험가입 의무는 없다”며 “다만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협력사에서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은 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티센코리아의 주장과 달리 당시 수사를 담당한 경찰은 사망한 노동자들을 티센코리아의 하청노동자로 봤다. 티센코리아와 설치업체는 불법 하도급 관계로 판단해 티센코리아의 안전관리자와 부사장을 불구속 입건했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은 “승강기 업계는 불법과 편법을 통해 대형 제조사에 특혜를 주는 구조로 돼 있다”며 “과도한 특혜를 막고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할 수 있도록 제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