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전태일 착취 없었다" 류석춘 교수님, 또 무리수입니다

신선민 입력 2019. 10. 20. 08:04 수정 2019. 10. 2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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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매춘"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류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번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을 언급해 시끄럽습니다. "전태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 누구에게도 '착취'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없다"고 기고한 글이 문제입니다.

전태일 옛 사진


■어떤 맥락에서 '전태일' 나왔나?

문제가 된 내용은 '월간조선 10월호'에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 제조업 생산직은 착취당한 게 아니라, 계층이 상승해 상당수가 중산층으로 편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듭니다.
①전태일과 전태일이 보호하고자 했던 봉제산업 여성 노동자들, 이른바 '여공'들은 빠른 승진을 통해 임금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②1987년 전후 '노동자 대투쟁'을 주도한 중공업 남성 노동자들도 처우가 급상승해 고임금을 누리는 중산층 노동자가 됐다.

이 중 전태일과 봉제산업 노동자들이 '박정희 시대 착취가 없었다'의 사례가 될 수 있는지를 따져봤습니다.

‘전태일 평전’


<전태일 평전> 참조해 '착취 없었다'는 류석춘 교수

류석춘 교수는 주장의 근거로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수치들을 제시합니다. 기고 내용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6세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 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 3000원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가 있는가?"

"<전태일 평전> 내용을 꼼꼼히 따져본 결과는 1960년대 봉제산업 노동자의 상황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착취'라는 단어가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선 <전태일 평전>을 확인해보니 일단숫자는 다 맞습니다.

빠른 임금상승과 경력이동만으로 '착취 없었다' 근거?

그런데 1960년 말 고도의 경제 성장기, 당시 대다수 제조업 노동자들이 경험한 높은 임금인상률과 빠른 승진 자체가 '평화시장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당시 노동자 처우의 상승률을 볼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가져간 몫이 제공한 노동력에 비해 정당한 수준이었느냐는 점을 따져봐야 정확한 '착취'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미싱사 여공들


'착취':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 몫은 얼마였나?

'착취(搾取, exploitation)'는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성과를 빼앗는 행위로 정의됩니다.

전체 생산물 중 노동자들이 가져간 몫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경제지표가 있긴 합니다. '국민소득 중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인 노동소득분배율입니다. 평화시장의 노동소득분배율을 구해보기 위해 당시 사업장 영업이익 등의 자료를 구해봤는데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평화시장 노동자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합니다. 1960년대 말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했던 이숙희 씨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당시 버스회사를 운영하다 망해서 평화시장에서 봉제사업을 시작한 사업주가 있었는데, 2~3년이라는 빠른 시간 동안 재기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극심한 생활고에서 벗어나려면 최소 10년은 분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동의 대가가 자본가들에게 더 크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승진 사다리'의 정점, 재단사는 얼마나 받았나?

류석춘 교수의 취지대로 전태일이 '많은 임금'을 받은 것인지 가늠해보기 위해 현재 가치로 월급과 시급을 환산해봤습니다.

일단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승진 구조는 이렇습니다. 수습공에 해당하는 '시다'로 일을 시작해, '미싱 보조'나 '재단 보조'로 일하다가 재봉사의 당시 표현인 '미싱사'나 '재단사'가 됩니다. 이 중 남성노동자가 대부분인 재단사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저희도 역시 류석춘 교수가 참조한 <전태일 평전>을 인용했습니다. 평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하루 노동시간은 14시간으로, 휴무일은 월 2회로 잡아, 월 총 392시간(14*28=392) 노동으로 계산했습니다. '화폐가치계산'은 한국은행 소비자물가지수를 활용했습니다. 단, 한국은행 환산 프로그램이 1965년부터 계산 가능해 1964년 가치는 1965년 기준으로 파악했습니다. 또 평전에는 전태일이 갓 재단사가 된 1967년 월급이 명시돼있지 않아서 류석춘 교수가 추정한 액수인 1만 5,000원을 기준으로 계산했다는 점을 밝힙니다.

①전태일 월급의 현재가치


전태일이 '시다'로 일할 적 시급은 현재 가치로 153원입니다. 그리고 승진을 통해 재단사가 된 후 시급은 현재 가치로 1,237원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은 8,350원인데, 평화시장에서 최대치로 받았을 때도 최저임금의 7분의 1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류석춘 교수가 주장하는 대로 빠른 속도로 승진의 최정점인 재단사가 되더라도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②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직책별 월급 현재가치

아래 표는 1970년 10월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에 대해 조사한 임금 자료를 바탕으로 한 계산입니다.


재단사까지 승진한다고 했을 때 최대로 받을 수 있는 시급은 현재가치로 치면 1,582원에 불과합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 최저생계는 가능했을까?

1970년 정부가 정한 도시 근로자들의 최저 생계비는 2인 기준, 17,978원입니다. 1970년 기준, 평화시장 '시다' 월급인 1,800원~3,000원은 최저 생계비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3,000원~15,000원인 '미싱 보조'의 월급도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칩니다. 월급 7,000원~25,000원인 '미싱사'나 15,000원~30,000원인 '재단사'가 되어야만 비로소 최저 생계비와 비슷하거나 이걸 넘기는 게 가능합니다.

서울시 물가정보 홈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1970년 서울시에서 파는 자장면 가격은 100원입니다. '시다' 월급을 1,800원으로 쳤을 때 일당은 60원 남짓. '시다' 일당으로는 자장면 한 그릇을 사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래는 <전태일 평전>에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 달 월급은 1천5백 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백20원인데 일당 오십 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니기로 결심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1965년 전태일의 일기)

"('여공'들은) 집안 생계에 조금씩 보태고 나면 점심을 사먹을 여유가 없어서 1개에 1원짜리 풀빵 몇 개로 점심을 때우거나 아니면 아예 굶으면서 일하는 시다들이 태반을 넘는다"

전태일이 시다로 일할 당시 생활비가 모자라 종일 노동을 한 뒤에도 부업을 했다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1960년대 봉제산업 호황기, 하루 14시간이라는 살인적인 노동의 대가는 정당하게 지급된 것인지 의문입니다.

1960년대 후반 평화시장에서 전태일과 같이 '재단 보조'로 일했던 임현재 씨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서민들한테 더 힘든 게 물가도 물가지만 엥겔지수, 식료품 차지 비중 워낙 높았어요. 대부분 급여 월급을 먹고사는 일에 쓸 수밖에 없었는데, 류석춘 교수의 주장은 그런 걸 전혀 계산 안 한 그런 무식한 계산입니다."

■ 평화시장 노동자 모두가 승진?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평화시장에서 임금을 가장 많이 받던 재단사는 남자 노동자가 대다수였고, 전체 만 명인 평화시장 직원 중 300명, 단 3%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전태일이 노동운동을 통해 보호하려던 사람들은 평화시장 80~90%를 차지했던 여성 노동자, 당시 표현으로는 '여공'들입니다. 류석춘 교수가 평화시장 승진 사다리의 '최정점'으로 제시한 '재단사'는 극히 일부라는 것입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이숙희 씨는 "여공들이 월급을 제일 많이 받는 재단사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면서, "여성들은 대부분 시다에 머물거나 미싱사가 되기 때문에 '3만 원'이라는 재단사 월급은 여공들이 절대 받을 수 없던 액수였다"고 설명합니다.

■ 무시된 '장시간 근무'라는 최악의 노동조건

'착취'가 있었는지를 볼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조건, 노동 시간입니다. 류석춘 교수는 임금 산정의 변수인 노동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임금액수'와 '승진속도'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의도적 선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1971년에 이뤄졌던 청계피복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동자 60% 이상은 하루 12~14시간 일했습니다. 주당 시간을 따지면 72~98시간입니다.

ILO 자료에 따르면 1970년 당시 미국의 주당 노동시간은 40시간, 일본은 44.8시간입니다. 오래된 통계라 정확한 측정일지는 확실치 않으나, 자료로만 따지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미국과 일본 노동자들의 2배 정도입니다.

아래는 <전태일 평전>에서 전태일의 노동 시간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밤 11시까지 고된 노동이 이어졌습니다.

"노동 시간은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기간은 모통 아침 8시 반 출근해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일거리가 밀릴 때에는 물론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

'여공'들의 노동 시간 관련 설명입니다.

"아침 8시경에 출근하여 재봉틀 앞에 앉으면 낮 1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잠시 허리를 펴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도시락을 후딱 먹어치우고는 다시 허리를 꾸부리고 작업에 들어가 밤 10시나 11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생활, 중간에 변소 가는 일도 거의 없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생활이 평화시장 여공들의 일과였다"

"이 밀폐된 닭장 속에 갇혀서 끊임없이 재봉틀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하루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노동을 한다. 작업 도중에 일어나 변소 한 번 가려고 해도 주인아저씨와 미싱사 언니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 류 교수에겐 안 보인(?) 끔찍한 '노동 환경'

전태일이 분신까지 하며 외치던 것은 근로기준법 준수. 법의 테두리로 정한 조건만은 지켜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전태일이 시행한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입니다.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 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
미싱사 90%가 신경통 환자.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사람은 전부 환자이며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머티즘이 대부분.

"설문조사에 응한 1백26명(시다, 미싱사, 재단사 포함) 가운데 96명이 진폐,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1백2명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잘하지 못하며, 전원이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곱이 끼는 안질에 걸려있다고 하였는데…(후략)"

미싱작업을 하는 여공


"평화시장 내의 피복 가공 공장은 4백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정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좁고 낮은 방에 작업을 위해 너무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평전에 따르면 평화시장에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가도 삼 년밖에 못 써먹는다"라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여공'들의 건강이 그만큼 위협받는 환경이었다는 겁니다.

■ 1인당 GDP의 3배 벌었으니 착취 아니다?

류석춘 교수의 기고엔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전태일의 월급 2만 3,000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만 6000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8만 7000원이었으므로 연봉 27만 6000원은 당시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 총소득을 전체 인구로 나눈 수치입니다. 일을 안 해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도 모두 포함해 계산했다는 얘기죠. 그때는 특히 출산율이 높은 데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많았고 노인실업자까지 포함돼 일 안하는 사람 비중이 매우 컸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전체 소득을 이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해 1인당 평균 낸 거니까 이걸 노동자 급여와 비교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비교를 하려면,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급여를 제조업 종사자 임금 평균이나 도시 근로자 임금 평균과 비교하는 게 맞습니다.

지난해 류석춘 교수는 <전태일 바로보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기고문 상당 부분이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2017년 미래한국에는 '팩트와 페이크, 신화의 조합 <전태일 평전>의 실체'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번 기고문과 거의 유사합니다.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다'는 주장 그대로입니다. 같은 주장을 계속 유통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동료인 임현재 씨


■ "처음엔 분노했지만 이젠 측은합니다"…전태일 동료들의 증언

KBS 취재진과 만난 전태일과 평화시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 임현재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평화시장에서) 정해진 시간 일하고 정해진 돈을 준다는 게 아니라 되도록 많이 시키고 되도록 적게 줬습니다. 전태일을 만났을 때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고 우린 보호받을 존재라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뭉쳐서 개선하자는 말에 기꺼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처음에 류석춘 교수의 주장과 관련한 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분노를 느꼈습니다. 전태일 동기의 숭고한 희생도 있지만, 그 수많은 학자들은 그 당시 착취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젠 측은지심을 느낍니다."

류석춘 교수가 '전태일' 사례를 지속적으로 쓰는 건 무리한 일이고, 명백히 '견강부회'입니다. 더 이상의 재생산은 없기 바랍니다.

신선민 기자 (freshmi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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