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티 입고 발렌시아가 클러치 들고 등교 고교생, 도 넘은 '명품 사랑'

하지수 조선에듀 기자 2019. 10. 2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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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Images Bank

# “디올 카드지갑을 샀어요. 예쁘지 않나요? 다음으로 소개할 제품은 프라다 스니커즈예요.”

한 10대 청소년이 유튜브에 올린 ‘명품 하울(haul)’영상의 일부다. 하울은 구매한 제품을 품평하는 동영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 유튜버는 자신이 새로 산 지갑과 신발을 연방 카메라에 비추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상표만 봐도 누구나 알 법한 고가 브랜드의 제품이 그의 손을 차례로 거친다. 이 영상은 30만 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로 관심이 쏠렸다.

고등학생이 '명품 사랑'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들은 구입한 명품을 품평하는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리거나, 제품을 들고 찍는 '인증샷'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린다. 또래에게 인정받으려는 심리, 돋보이고 싶은 과시욕 탓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유행이 청소년 과소비를 부추기고 상대적 박탈감을 일으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기·절도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부모 손 빌리거나 알바… 사기·도난사건도 발생

"다들 겐조나 구찌 같은 명품 티셔츠 하나씩은 갖고 있어요. 발렌시아가 클러치도 많이들 들고 다녀요."

대구 수성구에 사는 고 2 김모군의 말이다. 그는 명품 브랜드의 티셔츠를 학교에서 일상복으로 즐겨 입는다. 김군은 "등교할 때 교복 안에 티셔츠를 입거나 따로 갖고 와서 갈아입는다"고 했다. 주모(고 2·서울 서초)양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친구들은 발렌시아가 옷에 구찌 신발, 샤넬 가방까지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고가 명품 브랜드에서 출시하는 여러 품목 중에서 학교에 갖고 다닐 수 있는 지갑과 가방, 티셔츠, 신발 등을 선호한다. 특히 유명 연예인이 소유한 명품을 사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최근에는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들이 입은 고가 브랜드의 티셔츠와 액세서리가 인기다.

이 제품들의 가격은 낮게는 10만원, 높게는 200만원을 웃돈다. 학생들 사이에 인기인 한 고가 브랜드의 반소매 티셔츠는 한 장에 70만원, 운동화는 60만원 이상이다. 목걸이도 100만원을 호가한다. 통상 한 달에 10만원 수준인 고교생의 용돈으론 엄두를 내기 어려운 액수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명품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에게 손을 벌리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마련한다. 정희원(고 3·경남 진주)군은 "구찌 지갑과 고가의 순금 액세서리를 구입하기 위해 하교 후 매일 5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고교생 '명품 계모임'도 있다. 대여섯명이 10만원씩 걷어 생일 등 기념일을 맞은 친구에게 선물한다. 유모(고 1·경기 광명)양은 "자기 생일에도 원하는 명품을 선물 받는다는 믿음에 다들 흔쾌히 돈을 낸다"고 했다. 모조품 구입자를 가려내기 위해 구별법을 속속들이 공부해 '검증'을 해주는 준전문가급 학생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기 피해도 우려된다. 실제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명품을 사기 위해 중고거래사이트를 이용하다 사기를 당하는 학생도 있다. 김비오(고 3·경기 성남)군은 "친구가 버버리 옷을 중고거래사이트에서 구입하려다 50만원 정도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도난사건도 빈번하다. 서민수 경찰인재개발원 생활치안교육센터 교수는 "명품을 갖고 다니는 학생이 늘면서 교내 절도·도난사건도 문제가 되고 있다"며 "일부 학교에서는 CCTV 설치까지 고민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명품 소비 '과시'에 박탈감 호소 잇달아

고교생은 왜 명품에 열광하는 걸까. 자기 만족감과 성취감, 과시욕이 주된 이유다. 소셜미디어에 명품 사진을 올리면 '부럽다' '갖고 싶다' 등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청소년은 성인보다 또래에 속하려는 욕구가 강해 주변 친구들이 명품을 사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제품을 구입하는 경향이 있다. 한때 '등골 브레이커(부모 등골을 휘게 할 정도로 비싼 상품)'로 불려 사회 문제가 됐던 해외 프리미엄 패딩 열풍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부 전문가는 남보다 앞서고 싶은 경쟁심리가 표출된 것이란 해석도 내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외모, 성적 등 다양한 경쟁에 노출돼 남과 비교하는 성향이 강하다"며 "경쟁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남보다 돋보이고 싶어 더 비싼 명품을 살 우려도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학생은 명품을 많이 소유한 것처럼 보이려고 제품을 구입하고 되팔기를 반복한다. 명품을 사들인 뒤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 중고거래사이트에 이를 되팔아 또 다른 명품을 사는 것이다. 새 명품을 손에 쥘 때마다 인증샷을 올리다 보면 어느새 명품족으로 이름을 알려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고교생의 명품 사랑은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사회의 허영, 과시욕이 청소년층에게까지 번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대열에 끼지 못하는 학생들은 자기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고교생의 명품 하울 영상에는 '현타(현실자각 타임·자기 처지를 깨닫고 허탈감을 느끼는 상태를 이르는 신조어)온다' '부모 잘 만나 부럽다' '부족한 형편에 책 살 돈 모으려 아르바이트까지 뛰는 나 자신이 불쌍하다' 등 비관적인 댓글이 줄을 잇는다. '돈 자랑한다' '허세 부리지 마라' '학생들에게 과소비를 조장할까 걱정된다' 같은 댓글도 달린다. 전수민(고 1·경기 광명)군은 "아직 돈을 벌지 않는 학생들이 무리해서 명품을 사려는 모습이 좋게만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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