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북한 짝사랑에 왜 국민이 상처받아야 하나

강호철 스포츠부장 입력 2019. 10. 21.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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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푸대접, 항의조차 못한 정부.. 오로지 '기-승-전-남북 올림픽'
국민 자존심 멍들고, 분노는 커져.. '2032 막장드라마' 보고싶지 않다
강호철 스포츠부장

잔니 인판티노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은 지난주 난생처음으로 심장이 벌렁벌렁,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월드컵 2차 예선 빅 이벤트를 보러 전세기까지 타고 스위스에서 평양으로 날아갔는데, 열광적 응원을 쏟아내는 5만 명 관중 대신 텅 빈 경기장에서 한국과 북한 선수들이 전쟁처럼 공 차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2023년 여자월드컵 남북 공동 개최를 먼저 제안했던 그였기에 충격은 더 컸을 법하다. 그는 "실망했다"는 반응을 내놨지만, 남북 공동 개최 제의를 다시 검토하겠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한 카드'는 매우 매력적인 상품이다. 성사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물과 기름 같은 둘을 하나로 잘 묶어놓으면 '대박'을 터뜨린다. 무대를 마련한 사람에겐 "세계 평화에 공헌했다"는 찬사가 뒤따른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이 그 최대 수혜자다. 2013년 IOC 최고 책임자에 오른 뒤 자기 능력을 과시할 큰 성과가 필요했는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마침 시선에 잡혔다. 그는 한국 정부와 힘을 합쳐 북한을 무대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만들어졌고, 평창에 인공기와 한반도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북한 최고위 인사들이 개·폐회식장을 찾았다. 바흐는 정치·이념·인종을 초월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올림픽 정신을 앞장서서 실천한 사람이 됐다.

바흐는 2032년 이런 기분을 한 번 더 맛볼지도 모른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평양에서 만나 2032 하계올림픽 공동 개최권을 따내기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서울과 평양을 자유롭게 오가며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를 즐기는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면, 그 효과는 2018 평창의 몇십 배에 달할 것이다. 사실 바흐로선 서울·평양 올림픽이 무산돼도 아쉬울 게 없다. 마침 호주 등 몇 나라가 벌써 유치에 적극적이다. 바흐에게 남북한 올림픽은 성사되면 좋은, '최상의 옵션'일 뿐이다.

정작 서둘러야 할 당사자는 남북한인데 모양새가 이상하다. 한국은 대통령이 앞장서서 가는 곳마다 '2032 서울·평양 올림픽'을 외치는데, 다른 한쪽은 미동조차 없다. 북한은 2020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조차 미적지근하다. 남북 관계 수은주가 1년 전에 비해 많이 내려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고, 자기 속내를 최대한 감추는 북한의 '배 째라' 스타일 때문이란 말도 나온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한국 정부는 남자 축구 대표팀이 평양 가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돌아왔는데도 큰 소리도 못 낸다. 관중 없이 경기를 치렀는데도, 응원단 없는 한국 팀을 배려해서라며 오히려 북한 편을 든다. 그러곤 대외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도와달라고 아쉬운 호소까지 한다.

현재 남북 관계는 한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일 뿐이다. 아무리 상대가 폭언해도 귀를 막고, 추한 행동을 해도 눈 감아 주고, 없는 사람처럼 무시해도 사랑으로 감싸려 한다.

이러다 진짜 서울·평양 올림픽이 성사라도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막대한 올림픽 준비 비용은 북한으로선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 국민이 낸 세금이 투입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이것저것 트집 잡으면서 생떼 부리고 손 벌리는 북한에 끌려가는 모습이 매일 벌어질 것이다.

정부의 일방적인 짝사랑이 연출해내는 '막장 드라마'에 국민이 상처받고, 굴욕감을 느끼고, 분노해야 하나. 그래서 국민은 묻는 것이다. 왜 북한만 먼저고, 북한만 사람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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