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시켜준다더니.. 이주여성 성매매 내몬 '예술흥행 비자'

박민지 기자 2019. 10. 2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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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으로 넘어온 필리핀 여성들이 유흥업소에서 성매매를 강요받고 있다. 앞서 유엔이 이 문제를 수차례 지적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자였다. 한국에서 연예·공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흥행(E-6, 연예) 비자’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을까.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으로 온 필리핀 여성 대다수는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입국했다가 성매매 업소로 끌려간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입국했다가 도착한 곳은 대부분 미군부대 인근 술집. 노래할 무대조차 없었다. 이곳에서 성매매를 강요받았다.

여성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월급이 나오긴 했으나 실제로 가져가는 돈은 당초 계약한 금액의 절반 정도였다. 고용주나 중개업자는 보험료 등 한국 생활 관리의 명목으로 임금을 가로챘다. 대부분 허위였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영업부담까지 져야했다. 하루 기본적인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다. 어떤 곳은 1만원짜리 술 1잔을 팔 때마다 1000원씩 계산해 임금을 줬다. 이를 채우지 않으면 그마저도 벌 수 없었다. 참다 못 해 업소에서 도망친 여성들은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다.

‘사기취업’에 이용되는 예술흥행 비자

이들은 연예·공연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술흥행(E-6, 연예) 비자로 입국했다. 해당 비자로 입국한 이들은 매년 2000여명에 육박하는데, 절반은 필리핀 여성이다. 매년 평균적으로 1500명 가량이 불법체류자로 남아있다.

예술흥행 비자는 어떻게 도입됐을까. 1960년대 들어 ‘연예인 취업 비자’가 탄생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공연, 전시 등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조금 다른 목적으로 ‘준 연예인 취업 비자’가 도입됐다. 이것이 예술흥행 비자인데 한국특수관광협회 요청에 의한 결정이었다. 협회 구성원 대다수는 미군 기지촌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국내 여성 인권이 신장되면서 유흥업소는 인력난에 허덕이게 됐고 협회는 빈자리를 외국인 여성으로 채울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예술계에 종사하는 외국인에게 주는 취업 비자를 세분화해 호텔이나 유흥업소에서 공연할 수 있는 비자를 따로 만들었다. 발급 기준은 간단했다. 오디션 영상을 촬영하고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사만 받으면 비자는 어려움 없이 나왔다. 예술흥행 비자에다가 나라 차원의 오디션도 봤으니 이들은 한국으로 건너오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고용주나 공급업자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도 “노래를 부르게 해주겠다,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꼬드길 명분이 생긴 셈이다.

6차례 발의·폐기 반복한 인신매매피해자보호법

유엔은 한국 정부가 해당 비자를 외국 여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거나 연예인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고 선의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예술흥행 비자로 입국한 필리핀 여성은 인신매매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유엔은 지난 2011년과 2012년 꾸준히 예술흥행 비자 문제를 지적했다. 미국 국무부 역시 ‘인신매매보고서’를 통해 같은 우려를 내놨다.

유엔 인신매매방지의정서는 상대방을 기망하거나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모집하고 인수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 부당한 조건으로 착취했다면 자발적으로 종사했더라도 인신매매라는 의미다. 심지어 2010년 이전까지는 비자 발급 과정에서 에이즈 음성 판정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들이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는 인권단체 반발에 제출 서류 일부가 삭제됐다.

도입 초기에는 공연 계약을 허가받은 업소만 외국인 여성을 직접 채용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기준은 대폭 완화됐다. 파견 계약을 맺은 인력업체도 외국인을 모집해올 수 있도록 했다. 기준은 완화하면서 관리는 더욱 소홀해졌다. 비자를 발급할 때 이들이 노동조건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지, 노동환경은 근로계약서와 같은지 면밀히 살피지 않았다.

예술흥행 비자를 악용하는 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앞서 제주지방법원은 지난 4월 연예기획사 대표 A씨(44)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연예인 파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연예기획사를 운영했지만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공연계약을 체결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예술흥행 비자를 받기 위해 허위 공연계약 서류를 제주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이후 필리핀 여성 수십명을 입국시켜 유흥주점 접대부로 공급했다. 또 자신이 직접 제주시에 유흥주점을 차리고 지난해 6월부터 8월까지 필리핀 여성 7명을 접대부로 불법 고용했다.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신매매 정의와 조건을 규정하고, 성매매 외국인 여성이 인신매매 피해자일 가능성이 있는지 살피며, 국가가 법적 조력과 피해 회복을 위한 지원을 할 수 있게 하는 인신매매피해자보호법이 18, 19대 국회 당시 6차례나 발의됐지만 무관심 속에 폐기됐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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