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물욕' 채워주는 경제는 어디에

입력 2019.10.2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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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한국 경제가 처음 겪는 ‘마이너스 물가’,
재정·통화 거시정책도 미시적 시점에서 출발해야

민간소비가 활력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서울 명동 거리가 한산하다. 연합뉴스

지난달 카드 사용 내용을 본다. 지출의 17%가 외식에 집중됐다. 15%는 편의점에서 썼고, 8% 정도 되는 생활 목록에는 동영상·음악 구독 서비스와 휴대전화 요금이 담겨 있다. 지난 1년을 돌아봐도 목돈 나가는 내구재는 대충 중고로 해결했고, 어차피 빌려 쓰면 될 차를 사고 싶은 욕망도 크지 않다. 그때그때 내 취향을 귀신같이 알고 올라오는 SNS 광고에는 혹한다. 그렇게 소소한 물건이나 책 따위를 일주일에 한두 개씩 골라본 것이 서비스나 식료품이 아닌 물건을 산 기억의 전부다. 그 정도로 ‘물욕’이 채워졌다.

소유가 아닌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로

‘나만의 것’이라고 믿는 소비의 목록도 이렇게 묶어놓고 보면 별날 게 없다. 2006~2016년 30대 1인 가구는 음식·숙박에 19%, 식료품 등에 11%, 통신에 7% 정도를 썼다니(통계청, ‘솔로 이코노미 분석’) 대략 비슷하다. 지난해 민간소비의 52.3%가 서비스에서 이뤄졌고 내구재 소비는 9.3%에 그친다(한국은행). 소유하기보다 빌려 쓰는 문화가 퍼지고, 여가 대부분이 스마트폰으로 이뤄지는 흐름이 강해질수록 소유가 아닌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서비스 소비의 비중은 늘어간다. 지난해 소매판매의 20.5%는 온라인에서 이뤄졌다. 오프라인 판매 대표 격인 대형마트 판매는 지난해 2.7%(물가효과를 제외한 불변지수 기준) 감소했다.

개인적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일정한 흐름 속에 있기도 한 나와 우리의 소비는 어떤 경제를 만들고 있을까. 소비는 경제활동의 최종 목표다. 사소해 보이는 소비 하나하나에 경제 전반의 상황이 담겨 있고, 그런 소비가 모여 또다시 경제 흐름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2019년 낯선 경제현상인 디플레이션 우려가 불거졌다.

디플레이션. 수요가 줄어 물건보다 돈이 귀해지고(가격 하락) 그 탓에 소비와 자산 취득은 미뤄지고, 돈이 돌지 않아, 다시 물건값이 내리는 현상이다. 우려에 불붙인 건 물가(소비자물가지수)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8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제자리걸음을 한 데 이어, 9월 0.4% 하락했다. 우리 경제가 처음 겪는 일이다.

장기적으로 소비 위축시킬 요소 많아

이 저물가 배경에 ‘수요 감소가 얼마큼 작용했느냐’가 논쟁의 핵심이다. 마이너스 물가를 수요 위축에 따른 디플레이션 징표로 보는 시각에 청와대의 해명은 날 서 있다. “이 물가는 1~2개월 있으면 사라지는 물가다. …사라질 현상을 놓고 ‘이미 디플레이션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과도하다.”(10월13일,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날카로울 만하다. 수요 감소로 인한 디플레이션은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소득을 늘려 수요를 자극한다. 대신 부동산이 아닌 소비로 흐르게 한다)과 닿아 있다. 디플레이션이 더 많은 사람이 말하고 믿어갈수록 가속화하는 ‘자기실현적’ 특성을 가진 점도 정부 입장에서 우려를 잠재워야 할 이유다.

정부는 수요 감소 대신, 농·축·수산물 가격 하락, 고3 무상교육 확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같은 공급·정책 요인을 강조한다.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다만 그 바탕에 전반적으로 약한 수요가 자리잡고 있는 상황을 무시하기 어렵다. 물가 상승이나 하락에서 총수요 압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GDP갭(인플레이션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잠재 경제성장률과 실제 경제성장률을 비교한 수치)은 올 들어 줄곧 마이너스다. 가계든 기업이든 무엇인가 사려는 욕구가 적고, 정부마저 이런 수요 부족을 채 메우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경기순환의 문제만도 아니다. 호황이던 재작년과 지난해에도 민간소비 증가율은 2% 후반에 그쳤다. 2000년대 초반 호경기에 10%가까이 소비가 늘던 것과 대비된다. 그래서 현재로써는 “디플레이션이라고까지 언급하기는 과하지만, 구조적인 수요 위축이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조영철 고려대 교수)는 평가 정도가 적절하다. 경기 하강기 으레 있는 소비 감소를 넘어 구조적 변화로 인한 지속적인 수요 위기를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은 디플레이션 우려를 경계하면서도 최근 저물가가 전통적인 경제학으로 쉽게 해석할 수 없다는 점도 짚는다. “미국 대공황 이후 주요 디플레이션 사례는 특정 국가에 국한된 현상이었던 데 반해 현재는 저인플레이션 기조가 주요국의 공통 현상이고 경제구조 변화 등으로 인플레이션 동학(물가가 오르는 경로)이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우리 경제의 디플레이션 리스크 평가’)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미국 대공황이나 일본 거품 붕괴 같은 과거 디플레이션 사례처럼 거대한 충격 이후 심각하게 움츠러든 마음만 소비를 줄이는 게 아니다. 즉각적이지 않지만 지속해서, 돌이킬 수 없이 소비를 위축시킬 요소가 많다.

저출산·고령화 같은 인구구조 변화가 우선 꼽힌다. 자녀를 키우지 않는 가구와 노인 가구가 늘수록 큼직한 재화 소비는 줄 수밖에 없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서비스는 아직 전체 경제 성장을 이끌기에 한계가 있다. 서비스업은 물건을 생산하는 과정이 없어 소비가 늘어봐야 기업 설비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고용이 줄어들 여지도 있다. 여전히 서비스업의 생산성과 임금 수준은 제조업에 이르지 못한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에서 생산가능인구(15~64살) 비중이 매년 1%포인트 하락할 경우 추세 인플레이션은 매년 0.02~0.06%포인트 떨어질 것으로 추정했다(한국은행, ‘인구구조 변화가 인플레이션의 장기 추세에 미치는 영향’). 우리나라 생산가능인구는 지난해부터 감소(-6만3천 명)했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이 10월13일 디플레이션 논란 등 최근 경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이너스 금리, 재정정책… 돈 푸는 세계

부채에 상당 부분 의존해온 성장과 여기에 기반을 둔 경기 확장이 한계에 이르기도 했다. 부채는 실물보다 유동성의 힘이 중요해진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어온 동력이다. 우리나라만 봐도, 한동안 기업이 빚을 끌어다 투자했고 외환위기 이후 가계가 빚을 끌어다 부동산을 샀다. 그렇게 자산가격을 올리며 경기를 떠받쳤다. 일정 수준까지 빚을 품고 자산가격이 오르고, 오른 자산을 구하려 다시 빚을 늘리면 경기가 진작되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수요를 제약하고 경기부양 효과도 사라진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통상 가계부채가 GDP의 70~75%에 이를 때까지는 자산가치가 커지는 효과로 경기부양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지만, 그 수준을 넘으면 가계의 목표 저축액, 빚 부담이 더 커져 수요가 위축되고 빚을 통한 경기부양 효과도 제약된다”고 말했다. 2018년 말 기준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의 98.9%에 이른다. 그럼 급격한 부채 축소가 답일까? 갑작스러운 빚 줄이기가 집값 급락으로 이어지면 그때야말로 재앙적인 디플레이션이 펼쳐질 수 있다.

인구구조가 바뀌고 그에 따라 소비 행태가 바뀌고, 과도한 부채 아래서 경기가 가라앉으며 물욕은 중장기적으로 움츠러든다. 소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분주하다. 아직 마땅한 답은 없다. 우선 “언제 어디서나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밀턴 프리드먼)이라는 격언을 따라본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춰 시장에 돈을 더 풀면 당연히 물가가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일본과 유로존을 중심으로 ‘마이너스 정책 금리’가 등장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역대 최저치인 1.25%까지 내렸다. 효과가 크지 않다. 갚아야 할 빚이 남은데다 구조적으로 앞날의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리라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자가 싸다고 무턱대고 빚을 끌어다 투자하거나 물건을 살 수요가 자극되기는 어렵다. 지나친 저금리는 오히려 은행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의 심장인 은행 위기는 전체 경제에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이는 다시 수요를 줄인다. 이전에 상상하기 어렵던 악순환이다.

그리하여 결국 정부가 직접 돈을 쓰는 재정정책이 남는다. 정부가 ‘어디에든’ 돈을 써서 기업과 가계가 채우지 못하는 수요의 부족분을 채워주면 반짝 소비 심리가 돌 수도 있다. 다만 구조적인 수요 위축을 해결하는 데는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소비가 일어날 만한 곳에 소득을 지원하고, 소비할 수 있는 사회로 구조를 바꿔가고, 돈 쓸 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재정을 지원해야 한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는 “재정정책이 남은 희망이지만, 단순히 총량을 넘어 세밀하게 어떤 부분에서 수요를 자극해야 효과를 극대화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다만 현실에서 소비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그 지점을 제대로 짚어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물욕 없는 사회’는 재정정책이 총수요를 봐가며 재정 총량만 배분하는 거시 정책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있는 곳, 향하는 곳을 살펴 적절히 지원하는 미시적인 시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만 거시와 미시를 잇는 그 길이 아직은 아득하다.

기껏해야 택시비·취미, 30대의 ‘제까짓 소비’

30대 초·중반에 접어든, 홀로 사는 친구들의 소비를 묻는다. “나는 택시비랑 가끔 술값.” “요즘 주방 기구에 관심이 많아졌어.” 집 얘기, 차 얘기는 별달리 하지 않는다. 당연히 대출을 받아야 할 텐데 자신 없다. 저마다 직장은 언제까지 다닐지 알 수 없고, 빚 갚을 소득이 꾸준하리란 보장도 없다. 우리는 이대로 나이 먹고, 좋은 요양원이나 여행 얘기를 하게 될 터다. 큰 물욕을 접고, 작은 물욕을 그날그날 채우며 사는 우리는 그동안 빚과 자산 취득, 생애 단계에 맞춘 대형 내구재 소비와 그에 따른 투자·생산의 순환을 당연히 여기며 성장해온 전체 경제 측면에서 골칫거리일 수도 있다. 한 친구는 이런 소비를 ‘제까짓 소비’라고 명명했다. 우리의 물욕을 바꿔내야 할까, 이전의 경제구조를 다시 생각해야 할까. 방향을 잡는다 한들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길인 것만은 분명하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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