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폭 사망' IS 지도자, 수줍은 소년에서 희대의 칼리프까지

정의길 2019. 10. 2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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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디, 예언자 무함마드 혈통 나눈 가계 출신
수용소 포로 생활 도중 무장세력 지도자로 변신
알카에다에서 독립해 이슬람국가(IS) 창설
마지막 여생은 다시 알카에다 근거지에서 마쳐
바그다디가 다닌 사마라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

이슬람국가(IS) 지도자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의 등장과 최후는 이라크 전쟁이 빚은 세력 공백에 따른 혼란의 산물이었다. 중동에 새로운 세력 판도가 짜이기 시작하자, 그의 몰락이 시작됐고 최후는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바그다디의 본명은 ‘이브라힘 아우와드 이브라힘 알리 바드리’다. 1971년 이라크 중부의 황량한 마을인 알 잘람에서 독실한 수니파 가정에서 태어났다. 양을 파는 그의 집은 평범했고, 그는 5명의 형제 및 몇몇 자매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지않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

집안도, 마을도, 본인도 특별하지 않았으나, 그가 나중에 사상 초유의 자칭 ‘칼리프 국가’ 수장이 된 중요한 자산이 있었다. 그의 고향 알 잘람은 이슬람을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의 후예들이 주로 사는 마을이었다. 쿠라이시 부족의 혈통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가 되는 조건이었다. 바그다디의 바드리 가계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혈통을 이었다는 것이다.

바그다디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집은 인근 사마라로 이주했다. 그는 평균에도 못 미치는 학생이었고, 고등학교 졸업 성적표를 보면 수학 등 중요 과목의 점수는 하위 50% 밖이었으며, 예술에서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학창시절의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수줍고, 내성적이고, 고립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모스크(사원)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아버지는 그를 쿠란 암송 교실에 등록시켰다. 그가 다닌 ‘아메드 이븐 한발’ 모스크의 주인 칼리드 아메드 이스마엘은 그가 곧 영적인 재능이 있어 사원에서 다른 소년들을 이끌고 봉사 활동을 주도했고, 이맘의 강론 때 쿠란 암송을 대표로 했다고 말했다. 친구들한테 문신을 제거하라는 보수적인 도덕관을 강제하기도 했다.

20살인 1991년 바그다디는 바그다드대학교의 샤리아 단과대학에 입학했고, 사담대학교로 진학해 이슬람 경전을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그는 재학 중 모스크에서 쿠란을 가르쳐, ‘셰이크(선사) 이브라힘’으로 불렸다. 그는 이때부터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교리를 전도하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의 축구팀 코치로 일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본주의적 이슬람 종파인 와하비즘에 관한 책자들을 나눠줬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모스크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1년 뒤 그가 부카 수용소에서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것을 친지들은 지켜봤다. 바그다디는 미군에 맞서 무기를 들은 처남의 집에서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주변부 인물에 지나지 않았고, 11개월의 구금 뒤에 풀려났다.

수용소 생활이 그를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는 평가와 구금 전에 이미 자발적인 이슬람 전사였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부카 수용소에서 그와 같은 텐트를 사용한 탈립 마야히(54)는 당시 30대였던 바그다디가 ‘아부 두아’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당시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은 조직을 꾸리기 시작해, 각 텐트마다 비밀 ‘에미르’(수장)를 선출했는데, 바그다디는 에미르로 선출됐다.

바그다디는 곧 ‘이슬람국가’(IS) 성장의 중심 전략이었던 시아파 축출을 수용소에서 주도했다. 미군 침공 뒤 이라크에서 시아파 득세에 대한 수니파들의 분개는 이라크 전쟁의 주요 동인이었다. 바그다디는 수니파 폭력단을 조직해 시아파 수용자들을 텐트에서 몰아냈다. 수니-시아파 분쟁은 알카에다 본부에서도 우려하며 금지를 명령했으나, 이라크 알카에다 지부는 이를 무시했다. 이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이 이슬람국가로 독립하는 이유가 됐다. 시아파를 몰아내자, 바그다디는 동료 수니파들에게 이슬람 계율을 엄격히 준수하라고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마야히는 회고했다.

2004년 말에 풀려난 바그다디는 그 후 몇년 동안 종적을 감췄다. 2009년 이라크군이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한 안전가옥을 급습해 자료를 획득했는데, 거기에 ‘아부 두아’라는 이름이 있었다. 몇달 뒤인 2010년 3월 미국인 닉 버크를 처형한 혐의로 마나프 라위가 체포됐다. 라위는 심문 과정에서 비밀 메시지를 대원들에게 전파하는 자신들이 조정자 중의 하나가 아부 두아라고 밝혔다. 두달 뒤인 5월 알카에다의 이라크 세력인 ‘이라크이슬람국가’(ISI)가 새로운 지도자로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발표했다. 그가 ‘아부 두아’였다.

당시 이라크이슬람국가는 미군의 증강과 반폭동전략의 강화로 거의 궤멸 상태였다. 알카에다 본부와의 불화까지 겹쳐, 지도력은 공백 상태여서 무명의 바그다디가 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2011년 3월 시리아에서 내전 발발과 12월에 미군의 이라크 철수는 바그다디와 이라크이슬람국가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이라크이슬람국가는 시리아에 대원들을 파견해,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인 ‘누스라전선’을 결성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며 이슬람국가로 가는 길을 닦았다.

2013년 4월13일 바그다디는 육성 성명을 통해 누스라전선이 이라크이슬람국가에서 파생된 조직이며, 이제 두 조직은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 혹은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누스라전선과 알카에다 본부는 바그다디의 조직 통합에 반대했다. 하지만, 바그다디는 이를 무시했다. 한달 만인 5월에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시리아 북동부의 거점 도시 락까를 점령하고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통한 엄격한 통치를 했다.

아무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의 세력확장을 막지 않거나, 막지 못했다. 시리아 정부군은 친서방 반군과의 내전 때문에, 그리고 친서방 반군을 견제하려고 이들의 성장을 모른척했다.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들은 이들이 시아파인 아사드 정부를 압박할 것이라 생각했다. 터키는 이들이 쿠르드족의 영역을 유린하는 것을 기꺼이 지켜봤다.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내란이 만든 세력 공백에서 파죽지세로 성장한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1년만인 2014년 6월5일부터 시리아 동북부에서 이라크 쪽으로 대공세를 벌여, 10일에 이라크의 두번째 최대 도시를 모술을 점령하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그리고, 6월29일 바그다디는 모술의 모스크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칼리프’로 하는 이슬람국가(IS)의 창설을 발표했다.

2014년 5월 이라크 모술 점령 뒤 바그다디가 이 곳 모스크에서 공개적으로 첫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모술 점령 뒤 이슬람국가(IS) 창설을 발표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

그후부터 이슬람국가가 2019년 3월 마지막 근거지 바구즈가 미군 지원의 시리아 쿠르드족 민병대 세력이 주축인 시리아민주군(SDF)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그는 수차례나 나온 사망 보도 뒤에도 육성 성명을 내며 건재를 과시했다. 하지만, 바그다디는 모술 사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칼리프’로서의 최전성기였고, 그 후 줄곧 연합군의 추적에 쫓겼다. 그는 10년 이상이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슬람국가의 주요 간부들도 눈을 가리고 몇시간이나 이동시킨 뒤 자신과의 면담을 허락했다.

이는 이슬람국가가 중앙집권적 지도체제에서 지역별, 기능별로 네트워크화된 조직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가 시리아 알카에다 세력인 ‘시리아승리전선’(잡하트 파타흐 앗샴)의 근거지인 시리아 북서부에 은거한 것도 시사적이다. 시리아승리전선은 바그다디의 이슬람국가와의 통합을 거부한 누스라전선의 후신이다. 바그다디는 쫓기던 자신의 여생을 다시 알카에다에 의탁한 셈이었다. 이는 바그다디 이후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주도권이 다시 알카에다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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