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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천리장성은 없다.

임기환 입력 2019. 10. 3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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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82] "고구려 천리장성은 없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보고 독자분들 중에는 잠시 당혹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오해하지 마시라. 고구려 천리장성의 축조 자체가 허구라는 뜻이 아니다. 아래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우리가 '장성' 하면 떠올리는 한 줄기로 이어진 긴 성벽이란 형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지난 회에서 고구려 천리장성의 실체에 대해 기존에 제기된 두 가지 견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면이 적지 않음을 살펴보았다. 천리(500㎞)나 되는 장성의 실체가 잘 찾아지지 않는다면, 결국 장성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장성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인들이 애써 축조한 장성이 무용지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매우 유효한 방어적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구려 천리장성의 축조에 관련된 기록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외에 '삼국유사' 권3 '보장봉노(寶藏奉老)', 즉 '보장왕이 노자를 받들다'는 제목의 기사에도 보이고 있다.

"'고려고기(高麗古記)'에서 말하기를…개금(蓋金·연개소문)이 아뢰어 동북 서남에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공사는 16년 만에야 끝났다."

위 '삼국유사' 기록에서는 연개소문의 주청에 의해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천리장성 축조 시점인 631년 무렵에는 연개소문의 나이를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2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장성 축조를 주도할 만한 경력이나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642년(영류왕 25년)에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는 기사를 보면, 연개소문 또는 그의 가문과 천리장성 축조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성 축조의 시작은 아무래도 영류왕이 주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당과의 외교정책에서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던 영류왕 정권이기에, 당과의 충돌을 염두에 둔 장성 축조 역시 유효한 방어책을 내놨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해당 기사를 살펴보자.

"영류왕 14년(631) 봄 2월에 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천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두 기록 모두 16년이라는 긴 장성 축조 기간을 언급하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위 기록은 백성들이 장성 축조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으며, 국력의 낭비를 초래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불교 승려인 일연 입장에서는 도교를 진흥시킨 연개소문이나 영류왕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본래의 전승 자료에 천리장성의 축조가 상당한 국력을 기울이고 백성들의 부담이 작지 않은 대규모 토목공사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이 기록을 다시 음미하는 이유는 고구려의 천리장성 축조가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매우 큰 노력을 기울인 대사업이라는 점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다. 즉 이렇게 당시에 많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써 축조한 천리장성이 정작 당태종의 침공 때는 그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고구려인들이 상당히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16년에 걸친 장성 축조를 그 축조 시작 시점인 631년부터 따져본다면 장성 축조가 마무리된 시점은 646년이나 647년께가 된다. 다시 말해서 당태종의 침공을 물리친 645년 이후에도 1~2년 더 축조 사업이 진행되어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만약에 장성 축조가 완료되기 이전에 당태종이 침공하였기 때문에 장성이 방어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란 추정도 해봄직하지만, 이미 14~15년간 축조한 길이만큼의 장성조차도 전혀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장성을 오랫동안 축조했음에도 정작 당태종의 침공 때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면, 그런 장성을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1~2년간 축조를 계속해서 완성했다는 점은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즉 고구려인들이 14~5년간에 걸쳐 축조한 천리장성은 당태종 침공 시에 매우 효과적인 방어 기능을 수행했다는 전제에서 그 실체를 찾아야 한다. 당태종이 침공한 려당전쟁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뒤에서 차근차근 살펴볼 생각이다. 다만 여기서는 천리장성의 실체를 찾기 위해 당시 고구려의 어떠한 방어망이 당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는지에 대해 당시 패배의 쓴잔을 맛본 당나라 군신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당태종의 친정이 패배로 끝나고 다시 설욕하려는 의욕에 불타는 당태종이 1년여의 시간이 지난 647년 봄 2월에 다시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당 조정의 군신들이 당태종을 만류하며 내세운 이유는 이러했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에 사실상의 답이 있다고 본다. 당시 당의 군신들은 고구려 산성들이 갖는 뛰어난 방어력에 당군의 공격이 여간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645년 당태종의 친정 전쟁에서 충분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맞닥뜨린 많은 산성들,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천리장성 책표지 : 요하 일대 변강을 조사한 장복유의 저작

필자는 1995년부터 요동 지역을 답사하면서 고구려 천리장성의 실체에 대한 탐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른바 변강유적도 몇 군데 둘러보았지만 그때의 인상으로는 이를 천리장성의 유지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적어도 필자가 짐작하는 고구려인의 발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풍 성자산산성 표지석 : 산성연계장성설에서 장성의 시작점인 부여성으로 비정한 고구려성이다.

그리고 요동 일대 교통로마다 주요 길목마다 자리 잡고 있는 고구려 산성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고구려 산성은 크든 작든 험준한 지형과 뛰어난 축성 기술을 발휘한 방어시설임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매번 새로운 역사 자료를 발견하는 듯한 경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장성'이란 이미지와는 무관하다는 판단이었다. 더구나 고구려 산성은 5세기 이래 꾸준히 축성되었을 터인데, 새삼스레 영류왕대부터 16년 동안 집중적으로 축조했다는 기록과 아무래도 맞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궁금증은 필자로 하여금 15년이 넘게 요동땅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산성 수십 곳은 어렵사리 탐방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구석구석 나름 부지런히 고구려 산성을 돌아보면서, 적지 않은 산성에서 곧 닥쳐올 전쟁의 위기감이 배어 있는 흔적을 필자 나름대로 직감할 수 있었다. 고구려 산성의 옛터에서 1400년 전 고구려인들이 가졌을 전쟁의 위기감을 느낀다면 다소 감성적인 접근 아니냐는 비난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산성의 현장에서 문뜩 떠오른 필자의 느낌은 정말 그랬다.

필자가 나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고구려 산성 답사를 다니면서 갖게 된 귀중한 경험의 하나는 역사 현장에서 갖게 되는 직관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헌이나 발굴 보고서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역사에 접근하는 탐구 방법이다. 역사 공부란 과거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할 때 역사 현장에서 얻는 체험은 매우 소중하다. 역사를 좋아하시는 독자 여러분께도 책과는 다른 경험을 주는 현장탐방을 우선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다음 회에서는 16년간 고구려인들이 만들었던 천리장성이 무엇인지 필자 나름의 판단을 갖게 했던 고구려 산성 답사를 통해 얻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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