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사냥하고 여성은 아이 키웠다고?

이상희 입력 2019. 11. 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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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류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렌즈를 끼고 있다. 고인류 여성이 출산과 육아 및 가사를 담당하고, 남성이 나머지 일을 전담했다는 증거는 없다.
ⓒhttps://www.nps.gov/features/yell/slidefile/history/indians/Images/02718.jpg선사시대를 재현한 그림은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바탕으로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는 흔히 인류의 진화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떠올립니다. 네 발로 걷다가 차츰 몸을 일으키면서 키도 커지고 머리도 커진 현생 인류의 모습으로 변하는 그림 말입니다. 이 그림은 다양한 이유에서 틀렸습니다. 인류의 진화는 그림처럼 계단식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현생 인류는 그림에 나오듯이 항상 흰 피부는 아닙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인류가 곧 남성은 아닙니다.

남녀의 성비가 1:1이라면 서로 비슷한 수가 등장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그려진 그림에 여성이 등장하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습니다. 저는 <인류의 기원> (사이언스북스, 2015)의 영문판 <Close Encounters with Humankind>(Norton, 2018)를 내면서 책의 삽화에 여성과 남성을 골고루 넣고 싶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참고할 만한 그림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남성이 주로 그려진 그림이 많았습니다. 여성이 그려져 있는 그림은 아이를 안고 있거나 (가죽) 옷을 만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여성이 나오는 그림을 새로 그리기보다는 이미 <인류의 기원>에 실린 그림 중 몇 개를 골라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미국에서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냥하는 여성 그림은 영문판의 표지에도 등장했습니다.

고인류 여성이 나온 이미지를 찾는 일은 계속 시도했지만 번번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선사시대의 여성은 도대체 어떻게 그려질까요? 선사시대 여성이 대중의 상상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학원 학생과 함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여 선사시대 사람들 450여 명의 그림을 모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모은 그림을 살펴본 결과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향력 큰 ‘러브조이 가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 중 75%는 남성이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450여 명 중 남성 수는 여성의 3배에 가깝습니다.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을 찾기 힘든 것이 당연했습니다. 남성은 혼자서도 등장하고, 다른 남성들과도 등장하고, 남녀가 섞인 집단으로도 등장했습니다. 여성이 혼자 등장하는 그림은 단 한 경우였습니다. 그 외에는 여성은 항상 남성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수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하는 일 역시 달랐습니다. 그림 내용을 들여다본 결과 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림 속의 남성들은 서 있거나 서서 움직이는 자세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 여성들은 쭈그리고 앉거나 털썩 앉은 자세가 서 있는 자세보다 많았습니다.

남성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벽화를 그리거나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드는 장면에 등장했습니다. 남성은 70% 가까이가 사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창이나 돌도끼를 들고 큰 동물을 겨누거나 잡는 모습이었습니다. 여성의 30%는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남성은 1% 정도입니다. 장례를 치르거나, 동굴벽화를 그리거나, 이야기하는 등 문화 행위를 표현한 장면 역시 대부분 남성의 모습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동굴벽화를 그리는 이는 남성이지만 그 옆에서 물감을 개는 이는 여성이었습니다. 반면 음식을 만들고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었습니다. 이미지 검색에서 나타나는 선사시대 인류의 모습은 남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들이 사회·문화·언어 생활의 대부분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사시대라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사냥꾼 가설이 처음 인류의 기원과 결부되어 등장할 때, ‘Man the Hunter’로 표현된 ‘man’은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로 쓰였습니다. 실제로 표현된 것은 인간 중에서도 남성입니다.

‘Man the Hunter’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사냥은 남성의 행위라는 전제가 공공연히 깔렸습니다. 사냥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전제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남성성과 여성성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인류학계 일부에서는 ‘Man the Hunter(사냥하는 남자)’에 대응하는 ‘Woman the Gatherer(채집하는 여자)’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사냥은 성공 확률이 낮기 때문에 사냥으로 얻는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주식으로 할 수 없고, 식물성 먹거리를 구해오는 채집이 인류의 식생활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냥 가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사냥으로 가져오는 고기가 양적으로 적다고 할지라도 고기가 그만큼 귀하기 때문에 사냥하는 행위가 특권이 되고, 사냥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Australian Museum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된 동물들.

1981년에 ‘러브조이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인류학자 오언 러브조이는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핵가족으로 인류의 기원을 설명했습니다. 남자는 사냥, 여자는 채집이라는 성별 분업이 아니라 여자는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고 남자는 사냥·채집 등 무엇이든 먹거리를 마련해서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부양한다는 남성부양설입니다. 두 발로 일어서서 걷게 된 것 역시 남자가 먹거리를 마련해 집으로 가져올 때 두 손을 자유롭게 쓰는 데에 유익했습니다. 러브조이 가설은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검색한 이미지의 결과는 남성은 사냥, 여성은 채집이라는 성별 분업의 가설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냥하는 모습의 대부분은 남성이고 채집하는 모습 대부분은 여성이어야 합니다. 과연 사냥하는 모습은 대부분 남성이었습니다. 채집하는 모습은 대부분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채집하는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반반씩 섞여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보는 선사시대 인류는 사냥과 채집을 성별에 따라 분업하기보다 여성이 출산과 육아 및 가사를 전담하고 나머지 모든 경제·사회·문화 활동은 남성이 전담한다는 러브조이 가설에 더 가깝습니다. 러브조이 가설이 표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선사시대 고고학과 고인류학의 자료가 아닌,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입니다.

선사시대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 사실은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모습이라는 지적은 1990년대에도 있었습니다. 인류학자 다이앤 기퍼드 곤살레스는 교과서에 실린 그림을 분석했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두 배 이상 많은 수로 그려졌습니다. 남성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를 써서 사냥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남성은 장면 대부분에서 지도자의 위치와 권력을 보이는 포즈를 취했습니다. 한창때의 성인 남성으로 강인한 몸에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성이 장면의 앞쪽에 나올 때에는 젊고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채로 조각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있는 경우였습니다.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는 여성은 장면의 뒤쪽에서 어린이, 늙은이와 함께 화면의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여성이 움직이는 포즈를 취할 경우에는 땅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땅 위에 꿇어앉아서 가죽을 무두질하거나 빨래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림에 나타난 여성이 수적으로도 적으며 하는 일 역시 남성에 비해 범위가 좁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한 연구는 2017년에 구글 이미지 검색 엔진을 사용하여 미국의 웹사이트를 검색한 결과입니다만, 기퍼드 곤살레스의 연구 이후 25년이 지난 뒤에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박물관 전시 동물 75%가량이 수컷

지난 9월 초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 대학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박물관에 전시된 동물 중 들소·불곰·매머드는 수컷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전시된 동물 중 72~75%는 수컷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발견한 그림 속의 선사인 성비와 비슷합니다.

물론 전시된 동물의 경우 사회적 남성 편향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수컷의 행위와 행동반경이 포획에 더 용이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일단 전시된 동물들의 모습과 행위는 바로 동물의 대표적인 모습과 행위로 간주됩니다.

고인류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렌즈를 끼고 있습니다. 고인류가 성별 분업을 했다는 증거도, 여성은 출산·육아만 담당했다는 증거도, 남성은 나머지 일을 전담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이러한 그림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편하고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에 선사시대에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고인류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고인류학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메시지는 고인류에서 보이는 다양성입니다. 다양한 모습의 고인류를 상상하고 포함할 때 우리는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도 눈여겨볼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이상희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 인류학과 교수)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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