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 의원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공직을 맡을 생각은 없다" [인터뷰]

글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2019. 11. 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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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재인 정권 탄생에 기여한 사람으로 여하한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경찰대에 들어가서 경찰을 하고, 다시 교수와 국회의원을 하는 등 공직에만 34년 있었다. 공직생활엔 국민 전체의 봉사자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힘들고 늘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불출마와 함께 공직은 끝이라고 생각한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선거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혹시 대통령이 도와달라고 하면 도울 의향이 있나”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정권 후반기 청와대나 관료 등 임명직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그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표 의원을 지난 10월 30일 의원실에서 만났다.

정계은퇴 선언한 표창원 의원 인터뷰/이상훈 선임기자

-라디오 인터뷰에서 불출마 선언과 관련해 “좀비에 물린 것 같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정치권 전반에 대한 비판, 정치혐오로 비칠 수 있다.

“우려하는 바다. 그래서 ‘떠날 때는 말 없이 가라’고 하시는 분도 있다. 평소 느끼는 대로 이야기하는 편이다. 국회에 들어왔을 때 여당이 자유한국당이었다. 그러다 탄핵을 거치면서 여야가 바뀌었다. 상대방에게 ‘닥치고 무조건 공격’을 하다보니 정확히 과거 자신들이 하는 말과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떠올린 것이 좀비였다. 물어뜯다보면 나도 모르게 똑같지는 않지만 일부분 그런 면이 나타날 수도 있다.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은 아예 나 자신을 정치적 인간, 좀비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불출마 선언에 대해 지역구 주민들이나 소셜미디어(SNS) 댓글 등의 반응은 어떤가.

“가장 많은 반응이 ‘충격이다’, ‘번복을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만큼 남아서 실현해야지 떠난다면 ‘정치에 대한 희망’을 외면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그분들 말씀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다. 지역에서도 다른 형태로 정치를 해왔다. 유력·단체 인사와 교류하지 않았다. 그냥 일반시민들을 직접 만나 민원도 듣고, 법과 원칙에 입각해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그런 분들의 지적이라 무겁게 들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봐주신 분들도 있었다.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모두 종합해 심사숙고한 끝에 많은 것을 고려해 결정한 것이다.”

-가족들과 오래 상의해 내린 결정이라고 했는데.

“사실 정치활동을 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저보다 가족이 많이 받고 있다. 늘 긴장하고 조심한다. 3~4개월 동안 계속 이야기했다. 그때 처와 두 아이를 포함해 네 사람이 일치를 본 것은 ‘정치를 계속해도 말리지는 않겠지만, 가급적 이번까지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 지명과정을 보며 속으로 갈등도 일고 괴로웠다. 다시 가족회의를 열어 서로 합의했다. ‘불출마 선언을 하자. 단, 국정감사는 끝까지 마치고.’ 시기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당내 총선기획단이 만들어지기 전에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당으로서는 새 인물 영입으로 총선을 위한 인적 혁신 동력도 생기고….”

-국회의원의 83%가 386세대다. 그 중심엔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학생운동 경력이 있다. 그때 뭘 했느냐에 따라 선후배 인간관계 서열이 정해진다. 표 의원이 걸어온 길과 다른 정서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벽을 느끼진 않았나.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물론 내가 못느꼈기 때문에 그런 문화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독특한 내부정서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다.”

-당에서 ‘아싸’(아웃사이더)였다는 말씀 아닌가.

“스스로 ‘아싸’가 된 과정도 있다. 정치를 시작할 때 도와드린다는 의미로 왔지, 정치구조나 생리를 알고 온 것이 아니다. 정치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정치적 계파나 조직, 네트워크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초창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영입한 인사들로 ‘더벤져스’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콘서트도 하고 그랬는데, 그분들 사이에 느슨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톡방도 만들고. 그때 공개적으로 ‘이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더불어 어벤져스 활동은 끝났으니 이제 당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그 모임에서 나와버렸다. 국회의장 선거나 원내대표 선거, 전당대회 등에서 많은 분들이 같이하자고 찾아왔다. 무례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내에서 누구 편도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투표는 하겠지만, 별도의 식사나 자리는 안 만들겠다고 했다. 상당히 괘씸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후에 관찰해보니 당이라는 곳이 전당대회 때 어떤 후보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선거가 끝나고 승리한 팀이 주요 당직을 나눠 갖는다. 한편으로 당직을 맡지 않아서 편했다. 외부인이다보니 많이 존중해줬다. 진보진영에 그런 것이 있으면 보수는 보수대로 기수별 사시 몇 회, 어디 고등학교 몇 회 이런 식의 상하관계가 쭉 있었다. 그런 것은 더 잘안다. 나는 기수문화가 엄격하던 경찰대에서 기수 파괴자였다. 사석에서는 선배를 존중해드리지만, 선배라도 옳지 않은 것을 한다면 지지한 적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부의 폐쇄적인 사적 관계가 공적 영역의 판단에 개입하는 것을 절대 반대해왔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 화성 연쇄살인범의 진범 이춘재가 잡혔다. 경찰로 근무할 때 9차 사건은 화성에서 직접 겪기도 했는데 소회는 없나.

“내가 목격한 화성사건의 수사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대였다. 처음에는 86아시안게임이나 88올림픽을 앞둔 국가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숨기는 분위기였다가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악마의 존재를 터뜨리면서 오히려 사회적 통제를 했다고나 할까. 그런 아이러니가 있었다. 14살 중학교 1학년이 살해된 9차 사건이 최초로 접한 살인사건 현장이었다. 대원들과 같이 가서 현장보존하고 수색·검문검색을 했는데 그게 뼈에 사무쳤다. 현장의 모습이나 사건 현장을 보면 몰래 숨어 있다가 덮쳐 살해한 수준 낮은 친구인데, 우리가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났었다. 실형을 살고 있는 이춘재와 보관되어 있던 전 사건 범인 DNA·유전자와 비교해 진범을 잡아냈다는데, 또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국과수에 감사드리고 싶다.”

-정치를 그만두면 뭐하고 싶은가.

“추리소설도 쓰고 싶고,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토론 프로그램도 만들고 싶다. 2012년 경찰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어린이·청소년들을 대상으로 CSI 프로파일링 체험 아카데미 캠프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거기에 왔던 친구들이 지금도 연락하곤 한다. 그런 순수한 만남이 좋다. 경찰대에서 14년간 키워낸 제자들 중 일부라도 자기 역할을 해내면 얼마나 좋겠나. 어떤 부분은 저 아니면 못해낼 일이 있지만, 정치는 저 말고도 할 사람들이 많다. 정치하기 전에도 방송 출연은 했는데, 불러주면 고마운 일이다. 물론 정치대담 토크쇼 같은 데는 안 나갈 거다.”

글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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