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참사 끌어다 세월호 유가족 깎아내린 조선일보
[오마이뉴스 공시형 기자]
영국 정부는 그렌펠 타워 화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2019년 10월 말 1차 조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영국 텔레그래프 지는 10월 28일 이 보고서를 입수해 (10/28)이라는 기사로 보도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조사보고서는 소방 당국의 대처를 '체계적 실패'로 규정하고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엄청난 무감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보도를 받은 연합뉴스나 뉴시스의 기사도 대체로 '조사보고서가 제도적 실패와 소방당국의 실패를 지적했다'는 내용으로 보도했습니다.
누가 봐도 '세월호 기사'인 조선일보의 관련 기사
▲ △ 그렌펠 참사 관련 기사에서 세월호 암시하는 조선일보 기사(11/1) |
ⓒ 조선일보 |
"책임자 규명과 처벌 등 인적 책임은 1단계 조사에서는 우선순위에서 빠졌다. 2단계 조사까지 모두 완료된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사 과정에서 여야 정쟁이 벌어졌거나 책임자 처벌 요구가 분출하지도 않았다. 메이 당시 총리, 사디크 칸 런던 시장에 대한 사임 요구도 없었다. 유족들은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중략) 무어-빅은 조사위 활동을 개시하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의문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건의 실체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사위에 그렌펠타워 주민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 공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유족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감정 개입을 막겠다는 의지 표시였다. (중략) 조사 보고서가 나오자 생존자와 유가족으로 구성된 단체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성명을 내고 "오랫동안 결과를 기다려왔다. 진실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조사위를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그렌펠 유나이티드의 공식 입장과 별개로 일부 생존자는 "런던소방대 간부들을 해고하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모든 조사가 마무리돼야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가 이뤄질 것"이라며 거부했다."
'세월호'라는 키워드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누가 봐도 영국의 사례를 끌어와 박근혜 정권의 세월호 사건 책임을 희석하고, 세월호 유가족을 흠집 내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영국의 유가족도 가만있지 않았다
여러 기사와 사고 생존자 및 유가족으로 구성된 단체 '그렌펠 유나이티드'의 홈페이지를 참고해 보면 기사 내용도 대체로 사실이 아닙니다.
우선 조선일보는 조사보고서 결과 내용을 보도하면서 그렌펠 참사 조사위원장인 마틴 무어-빅이 강한 어조로 소방당국과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비판한 것에 "소방대의 최초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해당 지시를 더 빨리 철회했으면 사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발언 강도를 '자체 완화' 했습니다. 또 연합뉴스가 보도한 유가족 단체의 공식 성명에는 "이번 보고서 내용은 우리의 집을 죽음의 덫으로 바꾸는데 책임을 진 이들을 형사고발 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조선일보는 "오랫동안 결과를 기다려왔다. 진실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부분만 보도하며 그동안 책임 추궁이 없었던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그렌펠 참사에 정치 공방이 없었다는 보도 내용도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민영화라는 당시 영국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의 주요 정책과 메이 총리의 사건 대처 태도, 그리고 유럽 최대의 정치 사안인 이주민 문제가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만큼 당연히 '정쟁'이 벌어졌습니다. 영국 사회당 대표 제레미 코빈은 사고 당일 보수당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당신이 만약 필요한 지방정부 예산을 깎는다면 반드시 다른 형태로 비용을 내야 할 것"이라고 인터뷰했고, 서울신문 기사 <"서민만 다쳤다, 누굴 위해 공공예산 줄였나" 영국의 분노>(2017/6/15)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영국 사회에 불평등 담론이 부상하면서 보수당은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가디언지 (2017/7/2) 는 메이 총리의 지지율이 4월 +21%(긍정에서 부정을 뺀 지지율)에서 7월 -20%로 곤두박질쳤고, 사회당 제레미 코빈의 지지율은 같은 기간 -35%에서 +4%로 급상승했습니다. 테리사 메이 총리가 사임할 때 브렉시트와 함께 가장 큰 실정으로 지목된 것도 그렌펠 참사였습니다.
유가족들이 마냥 보고서가 나오기를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유족들이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지만 뒷부분에는 "일부 생존자는 런던소방대 간부들을 해고하거나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가 '일부'라고 규정하면 유가족이 아니게 된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2014년 5월 초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할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순수 유가족' 발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조사위에 그렌펠 타워 주민을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는 대목도 있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그렌펠 타워 주민을 사고 조사위원회에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렌펠 유나이티드 홈페이지에 공유된 기사 <'people have been so strong':how grenfell united is fighting for justice>(2018/7/25)에 따르면,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생존자들이 요구하는 위원의 조사위 참여를 위해 15만 명 규모의 서명을 모집했습니다. 가디언지는 이에 대해 "총리가 피해자들의 배경과 경험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조사패널들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렌펠 유나이티드는 아직 메이 총리가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청원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 언제까지 세월호 유가족 비방할건가
단순하게 생각해도 영국의 그렌펠 타워 조사위원회는 2년간 막힘없이 운영되었고 앞으로도 2년의 진상규명 조사를 더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정치권의 끈질긴 방해 끝에 2년을 못 채우고 해산됐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와 비교해 보면 조선일보의 이번 왜곡 보도가 더욱 악의적으로 느껴집니다.
앞서 <세월호 5주기에 타이거 우즈·민노총이라니>(4/23)에서 지적했듯 조선일보는 지난 4월 세월호 5주기에도 축소 보도를 하고, 2기 특조위 활동에 대해서는 "지난해부터 다시 '2기 특조위' 조사를 하고 있다. 억지에 가까운 의혹들이 여전히 횡행하고 또 '책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한다. 세월호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미련을 버릴 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월호 특조위가 전 정권의 방해로 마비되었던 기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세월호 특조위가 운영된 기간은 3년도 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세월호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 더 이상의 진상규명은 '정치적 이용'이라고 말하는 언론과 특정 정치집단이 있습니다. 그렌펠 사건 조사보고서로 한국 사회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9/11/1 조선일보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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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www.ccdm.or.kr), 미디어오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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