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엄마, 아파요" 보채도..미등록 이주아동 절반이 병원 못갔다

홍용덕 입력 2019.11.07. 05:06 수정 2019.11.07.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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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지역 불법체류자 340명 조사]
한국서 살지만 출생신고 불가능
법 개정돼 학교는 갈 수 있지만
병원 문턱은 여전히 높은 현실
응답자 52%가 "병원 못 데려가"
미충족 의료율, 국내아동의 10배
인권지원센터 "건강권 보장해야"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아이는 말했다. 엄마는 그런 아이에게 “기다려보자”는 말만 반복했다. 열이 오른 아이는 다시 “병원에 가요”라고 채근했지만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많이 아프니? 병원 안 필요해(병원에 갈 필요 없어)”라고 아이를 다독일 뿐이었다. 페루에서 온 아이 엄마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의료보험(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병원에 가는 건 엄두를 못 낸다. 진료비가 부담 되기 때문이다.

불법체류자 신분의 베트남인 부모를 둔 또 다른 아이는 충치가 9개나 있지만 치과에 가본 적이 없다.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아이 아빠는 말했다. “큰 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하고 싶지만 보험이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이들 아이는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여서 출생신고가 불가능하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하다 보니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출생등록을 하지 못해 흔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다. 2010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는 입학할 수 있지만, 여전히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이 많다.

6일 <한겨레>가 확보한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의 ‘2019 경기도 미등록 이주아동 건강권 지원을 위한 실태조사’ 최종 보고서를 보면, 경기도 미등록 이주아동(만 18살 이하)을 둔 부모 2쌍 가운데 1쌍은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가 아픈데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경험이 있는가’란 물음에 전체 응답자 340명 가운데 52.1%(177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아파도 병·의원에 가지 못한 사람의 비율인 ‘미충족 의료율’이 52.1%인 것이다. 이는 2016년 발표된 정부의 제7기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 나타난 국내 만 12~18살 아동의 미충족 의료율인 5.6%에 견줘 10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국내 아동은 100명 가운데 5명꼴이지만, 미등록 이주아동은 100명 가운데 52명에 이르는 셈이다. 이가 아프다고 호소한 아이를 둔 보호자 123명 가운데 40.7%(50명)도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다’고 답했다.

자녀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이유를 묻는 항목(중복 응답)에는 응답자의 39.3%가 ‘병원비가 비싸서’라고 꼽았고, ‘병원에 (아이를) 데려갈 사람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18.2%로 뒤를 이었다.

인권지원센터는 지난 1년 동안 경기도 불법체류자 340명을 면접 조사해 실태조사를 벌였다. 지방정부가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에 대한 실태조사를 이렇게 대규모로 벌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은 부모는 불법체류자란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고, 그들의 자녀는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동에게만큼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인권지원센터는 보고서에서 “의무교육인 초·중학교에서 학생의 체류자격과 관계없이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학교안전공제회 지원 대상에 포함해 지원하는 사례를 참고해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국적이나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과정 없이, 자체적으로 그들을 보건의료 행정 서비스에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아이의 건강권을 보장해주면 불법체류자를 양산하게 될 것”이란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생존권적 기본권’으로서 모든 아동의 건강권을 규정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후 유럽 등 세계적으로 미등록 체류자와 그 가족(특히 임산부와 아동)에게 국민(혹은 시민)에 준하는 건강권을 보장해주는 경향이 퍼지고 있다”는 지적도 강하게 제기된다. 이탁건 변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선 ‘건강권은 기본권으로서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당위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공공보건 예산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이주아동들이 건강하게 성장해야 노동시장에 정상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점을 들어 미등록 체류자에게도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한국도 이미 200만명이 넘는 이주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들 아동에 대한 적절한 의료 서비스 제공은 당위를 떠나 정책적으로도 합당하다”고 말했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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