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다시 소환된 '잔반의 기억'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2019. 11. 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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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교 시절 무시무시한 눈빛의 선배가 있었다. 차마 곁에 다가서기 힘들었다. 학교에 폭력서클이 여럿 있었는데, 그 선배는 건드리지 못했다.

“삼청교육대 출신이야, 저 선배.”

그랬다. 삼청교육대. 살아서, 몸 성히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는 말이 있었던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선배가 그곳에 끌려갔을 때가 고작 고교 1년생이었다. 그저 동네에서, 학교에서 껄렁하다고 잡혀갔다고 했다. 경찰서마다 학교마다 삼청교육대에 보낼 인원을 찍어 할당을 때렸다는 말도 있었다. 전두환 군부가 출범하고 사회악 일소니, 정의사회 구현이니 하여 내놓은 민심수습책이 바로 삼청교육대였다. 영장도 없이 사람을 잡아 군부대에 처넣고 ‘인간 개조’를 시킨다는 죽음의 명령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부의 정치깡패 처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다. 당시 텔레비전과 영화관의 대한뉴스에선 목봉체조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알았다, 목봉체조 좀 하고, 피티 체조로 기합을 주는 것이려니 했다. 그들 말대로 인간쓰레기를 사람 만들어 내보내주는 걸로 아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었다. 살아서 출소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지만 흉포한 소문이 돌았다. 무자비한 구타와 살상행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부대 조교로 근무했던 이들도 증언에 참여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명쾌하지 않았고, 배상도 제대로 안됐다. 최초 기안자, 결재자,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죗값을 치른 것이지” “깡패놈들은 좀 맞아도 싸”.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소위 건달과 깡패가 잡혀간 건 사실이다. 전과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영장도, 재판도 없이 강제구금될 이유는 없었다. ‘불량한’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통금을 어겼다고, 그냥 동네에서 사이 안 좋은 사람이 무고를 해서, 술 마시고 지나가다 ‘할당’에 맞춰 트럭에 태워진 이들도 있었다.

군대 시절, 자대는 바로 삼청교육대를 설치, 운영했던 곳이었다. 그 부대에서 오래 근무한 부사관들이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참혹했을 당시를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을 뿐. 삼청교육대는 모든 이들에게 비밀이었고, 고통이었다.

어떤 예비역 장군이 삼청교육대를 거론해 악몽을 소환했다. 끌려갔던 이들에게도, 그 참혹한 역사를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가진 많은 국민들에게도 악몽인 그 역사를 끄집어낸 셈이다. 어떤 언론에서 당시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동료가, 조교가 남긴 잔반을 주워먹다가 죽음의 폭력을 당했다는 증언이었다. 법적 근거도 없이 잡아간 사람들이니, 어떤 근거로 밥이나 제대로 줬겠는가. 피해자의 증언을 읽으면서 내게는 군대식 억압의 뚜렷한 상징이던, 보리 섞어 찐 밥 특유의 냄새가 기억났다.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주인공은 희멀건 양배추 수프 한 그릇으로 삶을 지탱한다. 수용소 간수들은 그 엉터리 수프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다. 음식은 인간 존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존재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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