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암에 개 구충제?..유튜브 위력에 의학계 '절레절레'

이혜인 기자 입력 2019.11.08. 21:23 수정 2019.11.0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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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펜벤다졸 위험한 복용 ‘열풍’
ㆍ식약처·의협·약사회·동물약협 등
ㆍ모든 의료단체 “부작용” 경고에도
ㆍ절박한 환자들, 경험담에 현혹돼

“남동생이 간암 3기 같다고 하는데, 펜벤다졸만 먹겠다네요. ㅠㅠ”(암 환자 카페글)

개 구충제인 ‘펜벤다졸’이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암 환자들 사이에서 펜벤다졸 복용 ‘열풍’이 불고 있다. 의사·약사 등 전문가들과 보건당국이 나서서 “펜벤다졸은 사람에게 효과가 없으며 다량 복용 시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수차례 설명·경고했음에도 한 달 넘게 지속된 펜벤다졸 열풍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펜벤다졸이 국내에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월 초다. 폐암 4기 환자인 미국인 조 티펜스가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은 후 펜벤다졸을 먹고 나서 암이 완치됐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기사가 국내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해외 뉴스를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에 조 티펜스의 이야기가 올라왔고, 이를 본 암 환자 중 몇몇이 자신도 펜벤다졸을 직접 복용하고 후기를 남기겠다고 나섰다. 폐암 말기 투병 중인 개그맨 겸 가수 김철민씨도 이 중 한 명이었다. 김씨가 10월 초 펜벤다졸 복용을 시작했다고 페이스북에 올린 후 펜벤다졸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했다.

펜벤다졸 열풍은 지난달 말부터 김씨를 비롯한 환자들이 “펜벤다졸 복용 후 통증이 줄었다”는 후기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8일 경향신문이 유튜브에서 ‘펜벤다졸’을 검색해보니 “효과를 봤다”는 환자들의 후기만 수십개가 검색됐다. 심지어 “펜벤다졸을 먹고 당뇨가 나아졌다”는 후기까지 있었다.

약국·동물약국에선 펜벤다졸이 일찌감치 동이 났다. 한 약사는 “펜벤다졸을 찾으러 약국을 순회하는 듯 보이는 환자가 하루 평균 5~6명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넷 중고거래 카페에서는 외국에서 직구한 펜벤다졸 의약품이 한 통에 2만~4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이마저도 글이 올라오는 즉시 판매가 될 정도다.

펜벤다졸 열풍이 불면서 의사·약사 등 전문가들은 비상이 걸렸다. 펜벤다졸이 사람에게는 어떠한 효능도 입증되지 않았고, 잘못 복용하게 되면 간 독성 등 부작용 우려까지 있기 때문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대한약사회, 대한의사협회, 대한동물약국협회 등이 잇따라 “펜벤다졸을 암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식약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구충 효과를 나타내는 낮은 용량에서는 (사람에 대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나, 항암 효과를 위해서는 고용량·장기간 투여해야 하므로 혈액·신경·간 등에 심각한 손상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 중이다. 의협은 “펜벤다졸을 복용하고 암이 나았다는 사례는 임상시험 결과가 아니라 효과가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개인 경험에 의한 사례 보고이므로 근거가 미약한 주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펜벤다졸을 찾는 환자들에게는 전문가들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일에는 ‘펜벤다졸의 암 치료 효능을 입증할 수 있는 임상시험을 정부 차원에서 진행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글까지 올라왔다. 암 환자 카페에는 말기암 환자뿐 아니라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2~3기 환자들까지도 “치료를 끊고 펜벤다졸을 먹어보려고 한다”는 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이대호 교수는 “펜벤다졸 열풍은 의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사회현상’으로 보인다”며 “펜벤다졸 유행의 중심에는 유튜브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전에도 상황버섯 등 각종 암에 효과가 있다는 식재료와 민간요법들이 암 환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은 있지만, 이처럼 빠르게 퍼져나간 사례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4~5년 전에 펜벤다졸이 소개됐다면 이렇게 크게 퍼져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유튜브의 ‘위력’이 의학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의 이동근 정책팀장 역시 “영상매체의 파급력이 워낙 크다”며 “판매자가 약을 팔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수요자인 환자들이 직접 만든 콘텐츠들이다보니 사람들이 더욱 신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업적 목적의 후기가 아니다보니 식약처에서도 약 판매를 금지하거나 영상을 올린 사람에 대해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교수는 “환자들의 절박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펜벤다졸을 사람이 복용할 경우 간 독성이 생겨 완치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며 복용을 자제해달라고 재차 당부했다. 이 교수는 “암이 아닌 다른 질병을 가진 환자가 펜벤다졸을 복용하다가 간 독성이 생겨 간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며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3~4기의 경우 간 독성이 생기면 간이 좋아질 때까지 아무런 치료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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