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헌고 사태, '반진보 10대 정체성'의 탄생?

정용인 기자 2019. 11. 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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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안티페미에서 반일사상 강요 주장으로… ‘사상독재’ 주장한 학생들의 진의는

지난 10월 2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인헌고등학교 앞에서 열린 ‘인헌고등학교 학생수호연합’ 소속 학생들의 기자회견에 많은 보수단체 회원 및 보수 유튜버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

“인헌고에 특별 파견된 장학사가 ‘아이들이 너무 편향적’이라고 낙인을 찍어 특별장학을 진행했다.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11월 7일 여명 자유한국당 서울시 시의원의 주장이다. 이틀 전엔 보수단체들이 이 학교 교장과 교사를 “인헌고 학생들에게 반일 운동을 강요하고, 자신들이 개입한 태양광 사업행사에 동원했다”며 직권남용과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인헌고 사태’는 지난 10월 22일 서울 관악구의 인헌고 재학생들이 ‘학생수호연합’(학수연)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교사들의 ‘사상독재 반대’를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학수연 측 학생들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내놓는 의혹과 문제제기를 다시 보수단체·언론이 받아 확산하는 양상이다. 의혹은 다시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이슈로 번지고 있다. 사태의 당사자들, 학교와 학수연 학생들은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일까.

“전략적으로 하는 것 같다. 굉장히 조직적이다. 언론 인터뷰를 한 두 학생은 명백하게 외부와 연결되어 지원을 받고 있다. 그 학생들 스스로 이야기한다. 교사면담 등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오겠다고.”

익명을 요청한 한 인헌고 교사의 말이다. 학교 측의 설명에 따르면 학수연 대변인을 맡은 최인호 학생이 외부와 연계되어 논란을 빚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정확히는 1학기 때였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안티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외부와 연계해 집회도 열었다. 당시 안티페미 주장에 아이들은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냉정한 반응이었다.”

■ 보수매체 공격 대상이 된 ‘혁신교육’

이 교사가 보기에 이번에는 그때와 조금 다른 양상으로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남녀합반이다. 그런 식의 극보수적인 주장이 호응을 얻긴 쉽지 않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 이번에는 아이들이 동요했다. 교사에 대한 반발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학교 앞을 찾아온 보수단체들의 ‘실체’를 본 뒤 아이들은 불과 하루이틀 만에 다시 급속도로 돌아섰다고 이 교사는 덧붙였다.

“지난해 우리 학교에 서울시 교육감이 닷새 동안 와 있었다. 혁신학교정책의 상징처럼 되어서 타깃이 된 것 같다. 그 친구들은 이미 그런 쪽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 같다. 교장선생님은 그래도 인간적인 설득이나 대화를 통해 풀려 했던 것 같고….”

말미에 그는 사견이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상황이 우려된다. 학생들에게 교사들은 진보적이기는 하나 기득권으로 비치는 것 같다. 위선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교 앞에 보수 태극기·엄마부대만 온 것은 아니다. ‘조국 아웃’을 외쳤던 서울대생도 방문했다. 아주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걱정되지 않는데, 이 일을 계기로 박탈감을 가진 보수청년층이 넓게 자리잡힐까봐 걱정된다.” 그러면서 인터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 세대가 가졌던 진보개념과 젊은 세대의 진보개념은 달랐던 것 같다. 이제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NO일본, NO재팬 반일파시즘’ 사상독재 논란은 이 학교 김모 국어교사가 주도했던 탈핵운동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김 교사는 현재 전교조와 무관하게 2017년 결성된 교사산별노조 교사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는 전교조 소속이 아니다. ‘팩트’만 놓고 보면 “전교조 교사들이 반일·탈핵을 주도하고 있다”는 보수매체 등의 주장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김 교사가 자신이 주도하는 탈핵운동에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주장과 관련, 천희완 교사노조연맹 민주시민교육연구소 소장은 “민주시민교육을 하는 입장에서 탈핵이나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활동”이라며, “교사나 공무원이 상업적인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시민단체 활동은 일반적으로 허용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희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참여할 친구들은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라고 본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사건 초기부터 사태추이를 유심히 봤다”는 한 교사는 다른 진단을 내놨다.

“교단에 선 교사가 갑이고 강자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일방적인 교사들의 자기의견 표출이 민주의식이 높은 10대들에겐 반발만 살 뿐이라는 것이다.

‘27년차 전교조 소속 교사’라고 밝힌 이 교사는 “정권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진 교사들도 전교조에는 있다”라며 “그런 교사들 조차 벌써 6년째 법외노조가 돼 탄압받는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전교조 소속 교사들도 이제 노령화됐다. 부장급이 많다. 혁신학교에서 부장급 교사는 권력자다. ‘행사를 할 때 어떤 구호를 외쳤느냐’의 논란을 떠나 머리띠를 두르게 한 것 자체가 아이들 표현으로 이미 ‘구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 고3들은 2001년에 태어났다. 1980년대 마인드로 21세기 아이들에게 시키는 것이다. 교사는 갑이고 강자인데 인터넷을 통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강요로 비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

■ ‘일베충 딱지’가 능사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아이들에게 “너 일베 하니?”라는 말을 했다는 주장도 사실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잘못 짚었다는 것이 이 교사의 지적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진보면 자동으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이 균질한 시각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생각은 울퉁불퉁하다. 한 반에 한두 명 정도 자기가 일베를 한다고 소위 ‘일밍아웃’하는 애들이 있다. 물론 그런 아이들이 적극 도발을 하면 수업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공식적으로 일베 주장이 환영받은 적 없다.”

답을 찾으려면 아이들의 변화된 조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티페미, ‘여혐’의 주체는 남학생들이다. 안티페미 성향을 갖고 있다고 다 일베 사용자라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경험적으로 여자아이들이 잘한다. 시키지 않아도 생기부(생활기록부) 활동, 예를 들어 위안부, 독도캠페인을 스스로 잘한다. 학력고사나 수능 초기세대와 학종은 다르다. 소위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하다. 흔히 인서울 지방거점 국립대를 가려면 학종을 1학년 때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안 되니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 20년 전에는 눈에 잘 안 보이던 고교서열화가 뚜렷하게 진행 중이다.”

고교 진학 때부터 ‘일반공립고’ 진학은 자사고와 특목고에 밀린다. “혁신교육 취지는 좋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에 ‘구린 행동’을 선생님들이 학부모 눈치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일반공립고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도시나 부유층·중산층이 많은 동네, 학부모가 자녀진학에 관심이 많은 곳 학교의 교사가 그런 구호를 외치게 할 수 있을까. 실제 자사고 교사의 경우 수업시간에 수위가 낮은 조그만 정치적 발언만 해도 학부모들로부터 전화가 엄청나게 온다.”

“탈핵은 보편적 상식”이라는 천희완 소장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까.

“탈핵도 자기들에게나 상식이지, 반일이나 반아베가 10대들도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일까.” 이 교사는 “세대문제는 이제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된 우리가 끝없이 성찰해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대중역사서 <유신의 추억>을 낸 표학렬 교사(50)는 현행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역사교사인 그는 고3 담임을 맡고 있다.

“우리 세대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동시대의 일이지만 현재 10대들에게 5·18은 내 세대가 6·25이나 4·19 경험담처럼 옛날 일로 들릴 것이다.”

그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시 확대에 대한 우려도 드러냈다.

“교사에게 주어진 수업시간은 총 60시간이다. 그 시간 내에 구석기 고대사부터 시작해 현대사까지 다 가르쳐야 한다. 교과서에 실린 현대사는 노무현 대통령 시기까지지만 시험 출제는 6·15선언까지다. 5·18과 관련해 가르칠 것은 딱 3줄에 불과하다. 그 틈을 ‘광주는 폭동이었다’는 식의 선동이 파고들어오는 것이다.”

앞서 인헌고 교사가 언급한 것처럼 학수연 대변인 최인호 학생에게 이번 사건은 2차전이다. 지난 5월 ‘성평화동아리’ 왈리(WALIH) 안티페미니즘 활동으로 학교 당국과 대립이 있었다. 학수연의 공식페이스북 계정 이외에 유튜브와 개인SNS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부모님의 정치성향은 진보다. 어릴 때부터 이명박근혜 욕을 많이 들으면서 컸다. 그래서 나는 올해 초까지 나를 진보성향이라고 자처했다. 어릴 때는 아는 게 없으니 부모님 말씀에 다 동의했지만 지금은 싸움날까봐 반박을 못 한다. 참 불편하다.”

7월 23일 “오늘은 그냥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며 올린 글의 한 대목이다.

아버지는 서울대 고고학과 출신이고, 할아버지는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다. 아버지의 정치성향은 ‘극진보’였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를 대하는 태도는 보수적이었다. 머리 탈색을 하고 집에 들어간 날 부모님은 보자마자 삭발을 시켰다. 고2 때까지 그는 밤 8시 통금을 지켜야 했다.

친구가 올린 생일축하 글을 보면 ‘포켓몬 덕후’였던 최인호군 역시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한 야구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아버지는 주말에도 근력훈련을 시켰고, 비싼 글러브를 21개나 사줬다. “그 돈 때문이라도 죄송해서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교사와 운동부 학부모 사이의 추악한 뒷거래를 알고 그만뒀다”고 그는 적고 있다. 그의 현재 정체성, ‘반진보성향’은 부모로 대표되는 ‘586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일까.

■진보의 실패가 우파포퓰리즘 낳는다

“한국형 대안우파세력이 10대와 20대에서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공정하지 않다> 공저자인 박가분씨의 말이다. 그는 “기성세대의 진보가치는 더이상 새로운 세대에서는 유효한 기준이 되지 못했다”며 “부모의 권위적인 태도, 교사의 강압적인 교육은 말로는 진보·좌파이념을 말하지만 생활에서는 ‘태도보수’라는 위선으로 비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10대나 20대의 반발이 역설적으로 학교에서 익힌 민주시민교육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결론을 미리 정해놓으면 안 되며,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중요시하던 원칙과 어느 순간 유입된 페미니즘과 같은 정체성 정치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집착이 도그마가 되어 충돌한 것이다. 아무리 잘못된 견해라고 하더라도 솔직하게 드러내 충분히 논의를 통해 걸러내야 하는데, 발언 자체가 단죄되는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PC주의 비판-역차별 주장이 대안우파 또는 우파포퓰리즘의 핵심논리다. 그가 보기에 대안우파의 탄생은 진보정치의 실패 때문이다. “얼마든지 진보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데 답을 정해놓고 기층의 문제의식이나 불만을 듣지 않으려는 진보의 권위적인 태도가 문제다. 이에 비해 우파포퓰리스트들은 단순하게 쉬운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민자를 추방해버리자’는 식의 선동이 선명해보이고 속시원하고 마치 공정한 해법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현재진행형인 인헌고 사태에도 바로 이 진보의 실패가 기저에 깔려있다.

“지금의 10대나 20대에게 ‘공정성’은 극도로 민감한 주제다. 평생이 스펙으로 관리되고 점수화되어 치열하게 관리·경쟁해야 하는 세대다. 인적자본 수준도 거의 수렴한 상태에서 1~2점 차이로 결과가 크게 뒤집히는 것을 경험해왔다. 조국 국면에서 그들의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은 계급대물림을 위해 자녀에게 다른 스펙을 만들어주기 위한 이른바 ‘부모 찬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이 외치는 ‘나도 조국이다’는 구호는 그런 그들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까.”

인헌고에 대한 서울시교육청의 특별장학 결과 발표는 수능시험 이후로 미뤄졌다. 서울시교육청 민주시민생활교육과 관계자는 “현재 지역교육청과 함께 각반별로 한 명씩 들어가 조사를 했고, 학교 측 입장과 학수연 측 학생들의 입장이 워낙 커 한 번 더 조사를 나가 심층조사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선현장에서 사회현안을 수업소재로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조례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현안에 대한 아이들의 비판적 능력을 키워낼 것을 강조해왔다”라며 “이번 인헌고 사건은 그 방향을 잡는 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없는지, 또 어떤 부분을 극복해야 하는지 면밀히 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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