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임신도 아닌데 무슨 증거로?"..장애인시설의 민낯

안서연 2019. 11. 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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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안 해서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성폭행 신고를 합니까?"

제주도 내 장애인 단기거주시설에서 벌어진 학대 의혹을 취재하다 해당 시설의 원장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말입니다.

20대 지적장애 여성이 시설 밖에서의 성폭행 피해를 호소했는데도, 임신테스트기에서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묵살해버린 해당 시설. 20년 넘게 장애인복지시설을 운영해 온 원장은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습니다. 시설 사무국장의 신체적 학대 의혹으로 시작된 취재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설 전체의 문제로 드러났습니다.

특수학교 교사의 신고로 시작된 '전수조사'


지난 5월, 제주도 내 한 특수학교에 다니는 10대 지적장애 여성 A양의 몸에 난 상처를 본 교사는 '학대'를 의심해 A양이 거주하는 장애인 단기거주시설에 대한 수사를 경찰에 요청합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해당 시설 사무국장인 40대 B씨가 A양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벽에 밀치는 등 4차례 학대한 정황을 파악했고, 지난달 초 기소의견을 달아 B씨를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넘겼습니다.

시설 측은 "A양이 폭력적인 데다 충동적이고 거짓말도 잘한다. 상처는 통학버스에서 스스로 다친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경찰은 통학버스에 함께 있던 친구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시설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설 원장은 사무국장인 B씨와 모자(母子) 관계로, 담당 경찰은 시설 내 다른 입소자들에 대해서도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제주도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전수조사를 의뢰했습니다.

입소자들과 생활 재활교사, 조리원 등을 상대로 전수조사에 나서자 "바늘로 얼굴을 찔렀다.", "목을 누르며 폭행했다", "종아리를 걷어찼다"는 등 또 다른 피해자들의 진술이 나왔습니다.


더 심한 것은 외부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20대 지적장애 여성의 호소가 묵살된 겁니다. 생활 재활교사를 통해 원장에게까지 보고가 됐지만, 원장은 임신테스트기를 시험하도록 한 뒤 증상이 없자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지 않았는지 묻자, 원장은 "우리도 눈으로 안 본 건데 어떻게 믿느냐"며 "내 눈으로 안 본 걸 증거도 없이 (신고)했다가, 만약 아니어서 내가 고발당하면 어떡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장애인복지법 제59조의 4항에는 '사회복지시설의 장과 종사자는 그 직무상 장애인 학대 및 장애인 대상 성범죄를 알게 된 경우에는 지체 없이 장애인권익옹호기관 또는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시설 종사자뿐 아니라 의사, 응급구조사, 구급대원, 교직원 등도 신고 의무대상자에 포함됩니다.

스스로 '장애인복지시설 운영 경력 20년'이라고 자부한 원장은 "신고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답했는데, 시설 종사자들에 대한 인권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원장 "공부 차원에서 입소자들 당직근무…일지 써야 파킨슨병 예방"


파면 팔수록 학대 정황은 쏟아졌습니다. 이 시설 거주자들의 장애 유형은 지적·정신장애로, 모두 여성. 시설 측은 이 장애 여성들에게 매일 문단속과 가스 밸브 단속 등 당직을 시킨 뒤 당직일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당직일지에 매일 사인을 해준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원장은 "당직은 전부 공부 차원에서 시키는 것"이라면서 "정신과 약을 먹으면 손이 떨리는데, 나중에 파킨슨병이 올 수 있으니 글을 자주 쓰라는 차원에서 일지를 쓰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일부 입소자들을 사무국장 지인이 운영하는 파프리카 농장에 데려가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원장은 "파프리카 따러 갈 사람 손을 들라고 해서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며 '직업재활체험'이라는 제목을 달고 찍어놓은 사진도 보여줬습니다. 사진에는 언뜻 보기에도 파프리카가 든 컨테이너가 6~7개가 쌓여있었습니다.

직업재활체험치곤 너무 많은 양이 아니냐는 물음에 원장은 "이 정도는 따야 한 달 치 식량이 될 수 있다"며 "이렇게 해야 식비가 절약된다"고 답했습니다.

전수조사 결과, 획일적인 두발 모양을 강요하고, 공용으로 옷을 입도록 하고, 반성문을 쓰게 한 정황들도 확인됐습니다.

4년 전에도 학대 의혹…통장 돈까지 꿀꺽?


전 입소자들을 수소문한 결과, 이 시설의 학대 의혹은 4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2015년 당시 입소자의 지인은 "하루는 사무국장이 ○○ 언니한테 물컵을 던졌는데 ○○ 언니가 피해버려서 다른 장애인이 맞아 이마가 찢어져 응급실까지 갔다고 들었다"며 "일을 시켜서 합격, 불합격 판단해서 벌 세우고 이런단 얘기도 들었다"고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보일러나 에어컨도 제대로 틀지 못하고, 여름에 선풍기조차 눈치 보며 틀어야 했다는 게 지인의 전언입니다.

당시 입소자의 남동생은 "60대였던 누나가 맞기 싫어서 밤에 도망 나온 적 있다"며 "시설 측에서 누나 통장을 관리하며 돈을 가로채기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동생은 "치과 치료비 명목으로 50만 원이 빠져나갔는데 진단서를 떼어보니 5만 원이었다"며 "이런 방식으로 빼간 돈이 얼추 천만 원이 넘어 원장한테 이의를 제기했고 일부인 3백만 원을 돌려받았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원장 명의로 두 차례에 걸쳐 3백만 원을 건네받은 통장내역까지 보여준 남동생은 "다 돌려받진 못했지만, 수년간 누나를 돌봐줬던 곳이라서 인정상 그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원장은 "당시 해당 입소자가 자신의 딸이 결혼을 한다면서 자신의 한복과 사위 반지 등을 사느라 돈을 많이 썼다"며 "하지만 이를 증명할 영수증 기록이 없고 가족이 자꾸 전화가 와서 귀찮아서 돈을 보내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이번 전수조사로 비슷한 의혹을 또 확인했습니다. 한 입소자에게 '한복을 맞춰준다' '치과치료비를 내야 한다'고 말해 돈을 빼갔으나, 실제로 그 목적으로 지출한 정황이 확인되지 않은 겁니다.

신체적 학대에 경제적 학대 의혹까지, 경찰은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의 고발로 해당 시설 원장과 사무국장을 장애인복지법 위반과 횡령 등의 혐의로 입건해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무국장은 지난달 제주시에서 직위해제와 직무정지를 명령하자 사표를 냈는데, 원장은 잘못은 없지만 충격으로 그만뒀다는 입장입니다.

학대 의혹을 확인하는 건 수사기관의 몫이 된 가운데, 응급보호가 필요한 4명은 현재 전원 조치된 상탭니다. 하지만 10여 명은 여전히 해당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어 혹여 2차 피해가 있진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방송보기]
“여성 장애인 시설서 학대…성폭행 호소도 묵살”
장애인시설서 노동 착취에 통장도 꿀꺽

안서연 기자 (asy0104@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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