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현대사의 조각들 한땀한땀 이어붙여 '미망'의 기억 소환하다 [이로사의 신콜렉터]

이로사 | 칼럼니스트 2019. 11. 1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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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KBS ‘다큐 인사이트-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방대한 KBS 영상 아카이브를 활용해 현대사의 재맥락화를 꾀하는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최근 늘고 있는 아카이브와 데이터베이스를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 미술’의 경향성을 반영하는 독특한 다큐멘터리다.

내레이션·완결된 서사성·폭로·희생자 인터뷰·참여 독려 없이

해당 시대 코미디·교양·드라마·뉴스 장면 추출, 기이하게 배치·조합·삽입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형식서 빗겨난 한 편의 블랙코미디 보는 듯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제1편 ‘우리의 소원은’은 박정희로 시작해 박근혜로 끝나는 다큐멘터리다. 잠에서 반복적으로 깨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청년이 다시 잠든 채로 끝나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오프닝은 잘 알려진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절 행사 장면이다.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경축사 중 갑자기 몇 차례 총격 소리가 들리고, 혼란 속에 검어진 화면 가운데 타이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가 떠오른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사건의 현장 영상이지만, 프로그램 어디에도 이 장면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현장이라는 지시적 설명은 없다. <모던코리아>는 영상 자료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영상 조각들은 새롭게 소환돼, 다른 발견된 이미지들 속에 배열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하나의 재료로 작동한다.

이어 재개된 화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며 준비된 경축사를 의연히 계속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지상목표는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인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바로 붙는 것이 <유머 1번지-탱자 가라사대>의 코미디언 김형곤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채 등장해 칠판에 ‘오늘의 주제, 민족 통일’을 적는 장면이고, 이어 당시 어느 드라마에서 젊은 오현경이 “통일의 한 길에도 이 한 몸 불사르리, 해방의 한 길에도 이 한 몸 불사르리. 소름 끼쳐”라고 말하는 장면, 실제 뉴스 영상 속 청년 학생운동가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울부짖으며 부르면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이 차례로 등장한다.

■ 아카이브, 기억의 재구성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는 아카이브의 재구성을 통해 현대사의 재맥락화를 꾀하는, 공중파 TV 다큐멘터리로서는 다소 독특한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아카이브 프로젝트’라는 말을 아예 전면에 내세워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이태웅 PD 연출의 서울 올림픽 30주년 기념 다큐 <88/18>의 방법론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여기에는 내레이션도, 완결된 내러티브도, 은폐됐던 사건을 폭로하는 희생자의 인터뷰도, 참여를 독려하는 주장도 없다. 이들은 대신 기존의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좀체 불러내지 않던 이미지들을 소환해 재배열한다. 방대한 KBS 영상 아카이브에서 해당 시대의 코미디, 교양, 드라마, 뉴스 푸티지 등을 다양하게 배치·조합해 과거 역사에 대한 대안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김기조의 복고적 타이포그래피와 디제이 소울스케이프의 감각적 음악이 특유의 인장을 찍으며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서의 톤을 유지한다.

<88/18>의 이태웅 PD가 연출한 <모던코리아-제1편 우리의 소원은>(이하 <우리의 소원은>)은 <88/18>에 이은 ‘89/19’라 칭할 만하다(실제로 그렇게 기획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88/18>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둘러싼 한국 사회상에 대한 흥미롭고 감각적인 콜라주였다면, <우리의 소원은>은 1989년 평양 청년학생 축전을 중심으로 1980년대 중후반의 학생운동사를 다룬다.

<우리의 소원은>이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희생자의 역사를 지배자 중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기존의 방식이 아니다. 작품은 거대 서사를 비판하며 공식화된 역사 자체와 대결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측면에서 바라보며 새롭게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우리의 소원은>이 바라보는 1980년대 후반은 민주화 운동의 열기와 공안정국의 엄혹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절이다. 작품은 1980년대 후반을 오랫동안 억압돼온 에너지가 분출구를 찾아 터져 나오던 “매우 특수한 시공간”으로 바라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형식상의 민주화를 이뤄낸 이후 오랜 기간 체제에 짓눌렸던 청년들의 다양한 욕구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시기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속의 이 시기는 미로 속의, 붕 뜬, 미친 광기의 희망이 유령처럼 공기 속을 떠돌던 때처럼 느껴진다. 마치 작품이 빌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대회 발언을 빌려 말하듯 “마음속에 공허를 가진 수천명의 젊은 청년들이 믿을 것을 찾아” 미망의 시기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에는 과거 영상 아카이브에서 발견된 다양한 장면들이 소환된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 영상들을 비롯해 당시 심야토론에 출연한 대학생들의 발언, <유머1번지>와 <쇼비디오자키>를 비롯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시사 풍자 장면, <사랑이 꽃피는 나무> 등 드라마에서 추출한 장면들, 공옥진 여사의 ‘병신 춤’ 공연 장면과 15년 후 통일이 된다는 예언을 내놓았던 1984년 베스트셀러 <단>의 ‘우학도인’을 찾아가는 장면 등 다양한 기록 영상에서 발견한 기묘한 이미지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남북학생회담을 공개 제의했던 김중기, 1985년 미 문화원 점거 사태를 벌인 함운경·홍성영, 당시 미 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캐슬린 스티븐스, 1984년 대학 신입생 문무대 입소 훈련장에서 연대장으로 선서하던 이인영(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 인물들의 현재 인터뷰 장면도 삽입된다. 이제 50~60대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이들의 발언은, 새로운 이미지의 배열 속에서 기존 구도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이재오 전 의원,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정치인들의 과거 청년 운동권 시절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운동권이란 무엇이었나?’ ‘미완의 혁명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나?’ 하는 질문은 기이한 에너지 속에 내내 이어지며 비판적으로 당시를 돌아보게 한다.

■ 다른 트랙 위에서

<우리의 소원은>에는 시계 알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는 청년이 모두 5차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배우 최재성이 출연한 당시의 드라마 중 한 장면(아마도 <사랑이 꽃피는 나무>)인 듯하다. 청년은 어둠 속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신음하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다가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 불현듯 눈을 뜬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영문을 모른 채 혼돈 속에 내던져진 얼굴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잠에서 깨어 반복적으로 향하는 곳은 시체가 누워 있는 곳이며, 그때마다 맞닥뜨리는 것은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내의 죽음에도 의연히 민족 중흥의 연설을 이어가던 박정희의 모습은, 박근혜의 으스스한 얼굴로 빠져나온다. 마지막 즈음 1989년 10월 어느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한 박근혜가 등장한다.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서 아버지, 어머니 기념사업회를 발족할 수 있게 된 거죠.” 박근혜는 사회자의 정계 진출 여부에 대한 질문에 “그럴 생각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5번째로 시계 알람 소리가 들리지만 결국 청년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채로 끝이 난다. 그것은 지금이 아직 ‘미망’의 시기임을, 그때 그 청년들이 아직도 눈뜨지 못한 시기임을 시사하며, 오늘의 우리와 강력한 관계를 맺는다. 여전히 위기를 알리는 종은 울리지만, 진짜로 깨어나지는 못하고,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고, 시대의 공기 위를 광기어린 에너지가 유령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다.

<모던코리아>는 최근 들어 많아지고 있는 아카이브와 데이터베이스를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 미술’의 경향성을 반영한다. 이것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우리가 현대사 다큐멘터리 하면 떠올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류의 다큐멘터리가 지향해온 모든 것에서 비켜서 있다. 아카이브 영상들을 ‘재료’로 재조합해낸 이 새로운 이미지는 과거 이미지들과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아직 해석되지 않은 혼란한 현대사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 이유다.

이로사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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