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 국민 호구(虎口) 시대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2019. 11. 16.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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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권력이 국민 압박, 요즘은 권력이 국민 앞세워 이득 취하는 질 나쁜 민주주의
국민이 주인은커녕 이용만 당하는 '호구' 신세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호구(虎口)'는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란 뜻이다. '호랑이 입'이라니 뭔가 위험할 것 같은데, 한자와 뜻이 딴판이다. 오히려 한자에는 바둑 용어 '호구'가 걸맞다. 바둑에서 '호구'란 '바둑돌 석 점이 둘러싸고 있어 상대방 돌이 들어오면 당장 따낼 수 있는 범의 입'을 뜻한다.

홍콩이 민주화의 열병을 이미 30여 년 전에 끝낸 한국에 조언과 지지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최근 한국을 찾은 얀호라이 홍콩 민간인권전선 부의장은 홍콩 과기대 2학년 학생이 시위 중 사망한 사건을 거론하며 "학생이 죽었을 때 홍콩 시민은 이한열을 떠올렸다"고 연대감을 표시했다. 홍콩에서 한국 농민이 WTO 반대 투쟁을 했을 때 평화 시위가 무엇인지 배웠다고도 했다.

그는 1980년대 한국 민주화 항쟁과 관련된 영화 세 편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이 홍콩에서는 권력을 거스른다는 뜻의 '역권(逆權) 영화'로 상영되었다며, 한국과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공통점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운동 경험이 많은 한국과 교류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홍콩의 눈에 비친 한국은 그렇게 앞선 '민주주의 선진국'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과연 국민이 주인인 나라인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주인은커녕 정치권과 이익단체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이용당하는 '호구'는 아닐까 걱정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권력이 직접 민을 압박했다면, 요즘은 권력이 민을 앞세워 견제하고 이득을 취하는 질 나쁜 민주주의가 횡행하는, '국민 호구 시대'는 아닌가 묻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여론조사를 믿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아무리 조사 방법이나 표본에 따라 오차가 있다고 하지만, 발표되는 결과는 조사마다 들쭉날쭉하고, 체감하는 여론과도 거리가 멀다. 여론은 민주주의를 키우는 자양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왜곡 양산되는 여론조사 결과는 자양분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죽이는 극약이다. 인터넷 여론을 조작한 드루킹 사건 역시 결코 가볍게 넘길 사건이 아니다. 인터넷 공론장에 독약을 풀어 자유로운 의견의 흐름을 끊고 사람들의 생각을 오도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민주주의는 절대 온전할 수 없다.

마치 청중이 왕이라도 되듯 '국프(국민 프로듀서)'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아이돌을 데뷔시키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를 조작한 제작진이 검찰에 구속되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제작사와 연예기획사가 적당히 뽑아 데뷔시키면 될 일을 마치 국민이 뽑은 아이돌처럼 보이게 하려고 청중을 속이고 시간과 돈을 빼앗았다. 민주주의를 이용한 좀도둑들이다.

정치로부터 가장 멀어야 할 교육 현장도 자유롭지 않다. 전교조 교사의 일방적 사상 교육에 학생들이 반기를 든 인헌고등학교는 마땅히 진상을 규명해 학생을 보호해야 함에도 오히려 교사를 옹호하고 학생들의 기묘한 따돌림과 대립의 장으로 변하고 있다. 어린 학생에게 이념의 덤터기를 씌우고 갈라치기 하는 곳에서 학생들이 뭘 보고 배울까 생각하면 섬뜩하다.

인헌고가 작은 이념 대립장이라면, 대한민국은 온 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 서로 아우성이다. 주말마다 광화문으로, 여의도로, 서초동으로 가는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 주말을 반납해야 하나. 정권의 입맛에 달면 '국민의 뜻'이라 추켜세워 이용하고, 쓰면 남 일 보듯 방관하는 정부는 민주 정부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다. 지금 정부는 마치 민주주의의 화신이라도 되듯 촛불을 앞세워 등장하더니 국민을 주인이 아니라 공짜 돈이나 밝히며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어린애 취급하거나, 돈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부동산 투기꾼으로 몰았다.

민주화 30여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나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콩에 알려주고 싶다. 자유선거에는 인터넷 여론 조작 같은 위험이 따르고, '송환법'이 없어도 귀순을 요구하는 사람을 북한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으며, 홍콩 경찰보다 더 힘센 권력기구도 정권 입맛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물론 국민의 뜻을 앞세워서다). 무한 현금 살포로 국민의 건전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자유와 인권이 종종 무시되는 민주주의도 있으며, 민주화 운동의 그늘엔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이 유공자 노릇을 하며 도덕적으로 군림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당신들이 지향해야 하는 건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좋은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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