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천하대란의 시대 / 슬라보이 지제크

2019. 11. 17. 18: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슬라보이 지제크 ㅣ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최근 중국은 언론을 동원해 서구가 홍콩 시위를 지지한 직접적인 결과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를테면 <환구시보>는 홍콩이 전세계에 시위를 수출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홍콩 시위가 전세계에 폭력의 불을 지피면서, 서구는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위협을 겪고 있다. 서구는 온갖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다. 그 문제들에 대한 불만이 결국 홍콩 시위의 영향으로 폭발하고 있다.”

스페인과 칠레의 시위가 홍콩 시위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은 억지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홍콩, 스페인, 칠레, 에콰도르, 레바논, 프랑스 등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시위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다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도 안일한 분석이다. 시위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촉발됐지만, 그 이유들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폭발할 일에 불을 붙인 도화선일 뿐이다. 시위들은 모두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공통의 원인으로 삼고 있다.

이상한 점 두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라는 중국이 전세계 지배계급에게 은밀한 연대 의식을 표하며, 각국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의 힘을 얕봐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시위들이 ‘천하대란’과 같은 극심한 혼란의 시대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시위는 가난한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는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시위들의 큰 원인이 경제성장 이면의 불평등과 양극화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시위들을 단순한 경제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시위대들은 경제적인 문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문제들, 예를 들면 집단과 개인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가치 있는 삶 등에 대해서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일어나는 시위들은 생태운동 및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페미니즘 운동은 ‘미투 운동’처럼 미국식 정치적 올바름으로 살균된 운동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여성이 참여하는 페미니즘 운동을 의미한다. 최근 멕시코에서 일어난 대규모 여성 시위가 좋은 예다. 이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존엄한 삶”을 요구한다. 이들은 지하철을 타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여성의 삶이 얼마나 큰 폭력에 침윤되어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대낮에도 수많은 여성이 지하철에서 납치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멕시코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멕시코 시위대는 또 국가가 여성을 남성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대신 오히려 남성의 폭력과 은밀하게 공모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국가는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을 처벌하는 대신, 그 폭력과 공모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년간 일어난 여성 대상 범죄를 보면 상당수가 국가 정책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많은 경우 국가의 사법체계는 이와 같은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고 있지 않습니다.”

국가가 폭력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이들의 말에서 우리는 지금 대규모 시위의 물결이 일어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국가의 외설적 공모를 깰 수 있는 힘은 대규모 조직화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의 대의정치로는 시위대가 표출하는 불만을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위들이 기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경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생태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포함해, 모든 불만을 대규모 운동으로 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임무에 실패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예외 상태와 시민 소요가 영원히 지속되는 사회일 것이다.

번역 김박수연

▶그게 뉴스냐? B급 아니고B딱!
▶한겨레 정기구독▶[생방송] 한겨레 라이브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