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고백할 줄 알아야, 정말 용기 있는 지도자"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9. 11. 18. 03:12 수정 2020. 12. 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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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나는 與圈과 더 인연이 있었지만 현 정권 보면 너무 걱정돼
탁상에서 만들어진 정책은 현장에서 시행착오 생기게 마련
'지지 세력 이탈한다' '밀리면 정권 끝장난다'며 그대로 고집
어렵게 축적한 원전 기술 경쟁력 최대한 살리는 게 국가 전략"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만난 것은 591쪽 분량의 ‘산업혁명으로 세계사를 읽다’를 대략 본 뒤였다. ‘지식의 향연(饗宴)’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교양서였다. 과총(科總)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75세에 이런 대작을 집필했다는 게 놀라웠다.

―공부하고 책을 쓰는 것도 못 고치는 습관(習慣) 같습니다.

"2011년 '원자력 딜레마'를 출간했을 때 '내 인생의 마지막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뒤 2014년 '사용후 핵(核)연료 딜레마'를 내면서 '눈이 침침해서 이제는 더 이상 못 쓰겠다'고 서문에 적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일 겁니다. 여섯 달간 집중 집필했더니 손가락 관절마다 무리가 갔습니다."

―이 방대한 '산업혁명 통사(通史)'를 읽으면서 그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1953년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폐허에서 한국을 재건하려면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2013년 우리나라 GDP는 1953년에 비해 1000배가 됐습니다. 세계 10위 경제권에 근접했고, 세계사에서 유례 드문 압축 성장에 성공했지요. 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저는 여권(與圈)과 더 인연이 있었지만 현 정권을 보면 너무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이성·합리·상식과는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요즘 들어 부쩍 느낍니다."

김명자 과총 회장은 “기술 혁신의 고삐가 풀렸으면 막을 수 없고 막아봐야 결국 닥친다”고 말했다.

그녀는 김대중 정부에서 4년간 환경부 장관을 지내 '헌정 사상 최장수 여성 장관' 기록을 세웠고, 노무현 정부 시절 여당 의원을 했다. 과총 회장으로 활동한 것도 문재인 정부에서였다.

"정부에서 일해본 경험으로 말하면, 탁상에서 만들어진 정책은 현장에서 시행착오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수정 보완하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과정입니다. 하지만 '지지 세력이 이탈한다' '여기서 밀리면 정권이 끝장난다'며 그대로 고집합니다. 이 때문에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커집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고백할 줄 아는 지도자가 정말 용기 있는 지도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이니 '혁신 경제'와 관련된 연설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나타나는 정책과 조치는 거꾸로였습니다. 가령 빅데이터·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될수록 에너지 수요는 더욱 증가하는데 '탈원전 정책'으로 갔습니다. 전력 사용량은 경제성장률의 1.4배로 늘어난다고 하더군요.

"원전 시대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자료를 정부에 제공한 적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원전은 계속 건설될 겁니다. 선진국에서는 원전 비율이 낮아질지 모르나, 개도국의 원전 계획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여건상 원전을 택할 수밖에 없고, 어렵게 축적한 원전 기술 경쟁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국가 전략이 돼야 합니다."

―'탈원전 논란'을 거치면서 오히려 원전 외에 대안이 현재로는 없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게 됐지요. 만화 같은 재난 영화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 결심을 한 것으로 알려진 문 대통령도 이제는 그 비현실성을 깨달았을 텐데,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 좋기만 하고 다 나쁘기만 한 에너지란 없습니다. 탈원전에 대한 비판은 할 만큼 하지 않았나요. 비판이 부족해 그러는 것은 아닐 테니, 이 자리에서 또 말한들 의미 없을 겁니다."

―이번 책으로 돌아가면, 과거 산업혁명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꾼 '무혈(無血)혁명'이었습니다. 산업혁명에 앞장선 국가가 세계사의 주역이 됐습니다. 기술 혁신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정치·경제·사상을 모두 바꿔놓았습니다. 자본주의의 탄생도 여기서 비롯됐고, 이에 맞서 공산주의나 수정자본주의 등이 생겨났고요."

―1차 산업혁명(1760~1830)은 와트의 증기기관으로 시작했다고 옛날에 배운 기억이 납니다.

"와트는 동네 세탁 공장 굴뚝에서 새 나오는 수증기를 보고서 에너지를 얻어낼 발상을 했습니다. 증기기관은 사업가 볼턴을 만나 상용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가 출현했지요. 증기기관이 기반(基盤) 기술은 맞지만 그 자체로만 농업·수공업에서 공장 제도로 도약하는 혁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을 이끈 것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한 기업가 정신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도 있었겠지요?

"개방과 혁신은 불가결 요소였습니다. 1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에서는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라는 과학자·공학자·사상가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선각자였어요. 지금 정부 역할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고 규제를 잘 풀어 혁신의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대 변화에 대비해 인재를 키워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교육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대입 시험입니다. 5지선다형 수능시험 공부는 학생들의 창의력을 죽이는 훈련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학생부종합전형 수시 제도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조국 사태'로 대입 전형의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자, 문 대통령은 정시 확대를 해답인 양 지시했습니다. 다시 퇴행하게 된 것이지요. 이를 국가 미래에 대한 철학이 없다고 해야 합니까?

"수능을 잘 치는 학생과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상 사이에는 분명히 괴리가 큽니다. 현행 교육 제도는 미세한 조정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미국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길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앞서 규제를 잘 풀어 혁신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는데, 4차 산업혁명에 맞춰 '공유 경제'(인터넷에서 정보 공유를 하는 것처럼 오프라인에서도 자신이 소유한 집·자동차 등을 남과 나누는 것)가 제기됐지요. 우리 사회에서 그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차량 공유 서비스 '타다' 를 놓고 논란이 불붙었습니다.

"집마다 자동차가 있지만 실제 이용 시간은 얼마 안 되고 주차장에 세워져 있습니다. 공유하면 자원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매연과 혼잡 비용도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로 대체되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갈등과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현실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피해 보는 집단이 생기니까요,"

―개인택시 운전사들은 이에 반발해 시위하고 분신자살도 했지요. 이런 현실적 제약에 후퇴해 '타다'는 변칙 콜택시처럼 됐습니다. 검찰은 '타다' 대표 등을 여객 자동차 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까지 했지요?

"새로운 혁신 기술이 어디로 향하고 어떻게 적용될지 모르는데 기존 법으로 규제하고 있습니다. 1차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을 이용한 방적기 등이 출현하자 기계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위기감이 고조됐습니다. 비밀 결사체 '러다이트'의 기계 파괴 운동이 일어났어요. 피해를 보는 집단에는 살길을 마련해주고 신기술의 진입은 허용하는 조화로운 정책이 필요합니다."

―개인택시 기사들은 일자리를 잃는 문제보다 1억원 가까이 거래되던 개인택시 면허의 시세 폭락에 더 사생결단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유재산을 강탈당한 느낌이겠지요. 특정 소수는 '혁신'을 내세우지만 그게 현재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생존보다 더 가치가 있을까요?

"산업혁명에는 늘 이런 명암이 있었습니다. 실제 공유 경제의 수익도 플랫폼을 운영하는 구글·페이스북 등이 대부분 가져갑니다. 이 기업들은 사용자들로부터 추출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막대한 비즈니스 수입을 올려왔습니다. 거의 공짜로 데이터를 장악해 산업계 권력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공유 경제가 아니라 플랫폼 경제'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저임금에다 불안정한 고용 상태로 떨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원론적 답변이 아니라, '타다' 논란에서 어느 쪽에 서겠습니까?

"영국은 승객 8명을 태우고 시속 13㎞로 달릴 수 있는 증기자동차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말이 자동차를 보고 놀라 폭주한다는 이유로 1865년 '적색깃발법(Red Flag Act)'을 만들었어요. 낮에는 붉은 깃발을, 밤에는 붉은 등(燈)을 든 사람이 앞에서 마차를 타고 '자동차가 온다'고 주변에 알리게 했습니다. 시내에서는 시속 3.2km로 제한했습니다. 마부들 일자리를 지켜주려는 규제였지요. 결국 30년쯤 지나서야 이 법은 폐지됐습니다."

―지금 30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과학기술 세상이 몇 번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겠지요.

"인터넷이 1969년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됐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36억명이 인터넷 통신망에 들어올 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기술 혁신은 갈수록 폭넓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정을 미룬다는 것은 세계 무대의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뜻입니다."

―'타다' 논란을 보면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기보다 외면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눈을 감는다고 눈앞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2016년 초 세계경제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바프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이 쓰나미처럼 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술 혁신의 고삐가 풀렸으면 막을 수 없고 막아봐야 결국 닥치게 됩니다. 차량 공유 서비스도 다른 나라에서 정착되면 결국 우리에게 보급되고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쇄국정책을 쓴다 해도 못 막아낼 겁니다. 정부는 지금 진행되는 변화 물결이 어떤 것인지 인식하고 적극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 어느 때보다 국가적 위기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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