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대명창의 꿈은.. 여전히 일급 광대

전주=김경은 기자 2019. 11. 20.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일구 명창]
70년 藝人 길 걸은 80세 소리꾼.. 23일 국립극장서 '적벽가' 완창
아쟁·가야금도 능한 팔방미인
"젊은이만치 지르지는 못허겠지만 듣는 이들 가슴 콱 움켜잡을라요"

명창이 되려면 득음(得音)을 해야 한다. 좋은 목소리였으나 변성기를 지나며 목이 막혔고, 산중 폭포에서 소리도 질러봤으나 바라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십대 안짝"이던 그는 손에 쥔 대나무 통을 반으로 갈라 그 안에 고인 연노랑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왕대를 동네 공중변소에 넣고 100일간 걸러낸 맑은 똥물이었다. 여든 살 소리꾼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통 크게 웃었다.

"여전히 무대에서 소리를 할 수 있어 내겐 또 하나의 기쁨"이라는 김일구 명창. "구한말 최고 권력자 흥선대원군이 판소리를 참 좋아해서 당시 소리꾼들은 갓을 쓰고 임금 앞에서 소리를 했다"고 했다. /김영근 기자

여자 소리꾼 중 안숙선이 으뜸이라면, 김일구(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전수교육조교) 명창은 남자 중 최고다. '판소리계 파바로티'인 그가 23일 오후 3시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박봉술제 판소리 '적벽가'를 3시간 40분 동안 완창한다. 1987년 같은 무대에서 '적벽가'를 선보인 이후 아홉 번째 서는 완창 무대. 북 앞에 앉는 고수는 지음(知音)인 김청만(73)이다. 지난 14일 전주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에서 만난 그는 "젊은 사람들만치 지르지는 못허겠지마는 쌓아온 노하우가 있응께 마지막 무대로 멋지게 해봐야되겄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예술인으로서는 눈물이 나오려 한다"며 눈가가 벌게졌다.

"늦게 터진 소리꾼"이었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소리를 했지만 사춘기 때 목이 막혀 대신 악기를 만졌다. 장월중선에게 배운 아쟁은 따라올 자가 없고 가야금·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소리 열망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박봉술 명창을 찾아가 "'적벽가' 좀 가르쳐주소" 했다. "사십대 가차울 때"였다. 그가 배울 능력이 자로 잴 때 "90센치(㎝)만큼이라면 스승은 40~50센치만" 겨우 가르쳐줬다. 지금은 가사책과 녹음기가 있지만 그때는 수업 한번 들어가서 너덧 장단 세 번 듣고 나면 바로 내쫓겼다. 웬만큼 소질이 있지 않고선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조금씩 가르쳐서 도장 찍듯 몸에다 딱딱 찍어주려 했던 스승의 배려였던 거여."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아쟁 연주로 기악부 장원에 올랐던 그는 1983년 소리꾼이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배우 배용준과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내가 KBS '국악 한마당'에 출연할 때 배용준씨는 국악인들 의상을 담당하는 어린 스태프였어요. 그는 우리들 공연을 끝까지 지켜보며 의상을 점검했고, 끝나면 연속극 녹화장으로 달려가 배우들 연기를 살폈지요. 배우 지망생이었으니까."

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중 적벽대전을 다룬 '적벽가'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가장 부르기 어렵다. 유비·관우·장비·조조 등 영웅들의 호방한 기세를 배 속에서 바로 뽑아 불러야 해 웬만한 공력을 갖추지 않으면 금세 나가떨어진다. 또렷한 발음으로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진 듯 전달하는 그는 높고 낮은 음에 두루 능하다. 박진감 넘치는 '조자룡 활 쏘는 데' 대목은 물론, 죽은 조조의 군사들이 새가 되어 조조를 원망하는 '새타령'처럼 처연한 아름다움도 능란하게 그려낸다. "목만 좋아서 우물우물해봐야 소용없어요. 뭘 알아들어야 감동도 허는 거니께."

흔히들 가면 쓰고 탈춤 추는 사람을 '광대'라 한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아니라 "넓을 광(廣)의 '광대'를 꿈꾼다"고 했다. "옛날 어르신들 소리는 큰 바윗덩이 같어요. 수천년 물살에 씻겨나간 차돌처럼 매끌매끌헌 요즘 소리와는 판이허지. 하지만 쭉 가다 보면 어디선가 커다란 바위가 콱 떨어져 박히는 무게감! 그때 청자들은 '얼씨구' 추임새를 넣는 거지요." 그는 "자기가 최고로 잘하는 걸 속에 품고 있으면 괄시할 사람, 푸대접할 사람 아무도 없다"고 했다. "듣는 이들 가슴을 콱 움켜잡는 '일급 광대(廣大)'가 되어 보고 또 봐도 계속 보고 싶은 소리꾼으로 남고 싶다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