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눈물] '兩制'보다 '一國'에 꽂힌 시진핑

김회권 국제 칼럼니스트 2019. 11. 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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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양제 해석 엇갈리는 베이징과 홍콩
덩샤오핑의 마스터플랜 흔들려

(시사저널=김회권 국제 칼럼니스트)

11월17일 홍콩 이공대 주변에서 벌어진 경찰과 시위대 간 충돌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찰 장갑차가 전진하자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맞섰고 시위대 차량이 돌진하자 경찰은 실탄을 쏴 저지했다. 홍콩 경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공대 앞 도로의 바리케이드를 청소하자 시위대가 이들을 공격했고 경찰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또다시 충돌이 벌어졌다.

이 모든 비극적인 충돌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다. 홍콩인들은 홍콩 기본법 제5조를 준수하라고 주장한다. 이 법은 2047년까지 '일국양제(一國兩制·one country two system)'를 보장하게 돼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를 무시하면서 이번 사태가 벌어졌다고 홍콩인들은 보고 있다. 반면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를 홍콩인이 존중하지 않는다며 시위대를 비난하고 진압에 나섰다. 같은 '일국양제'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양자 간의 극한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2년 12월8일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 롄화산 공원에서 고 덩샤오핑 중국 국가주석의 동상에 꽃바구니를 바치고 있다. ⓒ Xinhua 연합

홍콩 반환의 결정적 무기였던 '일국양제'

"홍콩은 덩샤오핑 동지의 유지를 받들어 일국양제로 통치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이 자유를 누리도록 하겠다."

유니온잭이 내려온 자리를 오성홍기가 대체한 1997년 7월1일 0시. 홍콩 주권이양식 경축사에서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두 가지 원칙을 강조하며 불안에 떠는 홍콩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나는 항인치항(港人治港)의 원칙이었다. 홍콩인은 홍콩인이 다스린다는 걸 뜻했다. 다른 하나는 일국양제였다. 하나의 국가 안에 두 개 체제를 조화롭게 공존시키겠다는 대원칙이었다. 일국양제는 역사상 유례없는 정치 실험이었다. 당시 리덩후이 대만 총통은 "사회주의 체제가 민주주의와 함께 있을 순 없다"며 비판했고, 서구에서도 우려가 나왔지만 중국은 마치 기우라는 듯 일국양제 유지를 확신했다.

일국양제를 세상에 갖고 나온 사람은 덩샤오핑이었다.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라는 개념을 처음 내놨다. 원래 대상은 홍콩이 아닌 대만이었다. 중국이 통일되더라도 대만의 체제를 인정하겠다는 게 핵심 구상이었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지도자였던 그는 "문제의 핵심은 중국 통일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들이다"고 주장하며 보수파의 우려를 불식했다. 그런데 정작 일국양제가 현실에 도입된 것은 대만이 아닌 홍콩이었다.

1982~84년 영국과 홍콩 반환 협상을 가진 덩샤오핑이 내민 카드가 일국양제였다. 1982년 9월24일 베이징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홍콩은 이미 자본주의가 뿌리내렸다"면서 1997년 이후에도 영국이 홍콩을 지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중국 정부가 강하게 반발한 건 당연했다. 덩샤오핑은 "주권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고 거절하며 홍콩을 일국양제의 원칙 아래 다스릴 것이라고 제안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겠다는 중국의 주장에 영국 정부는 허를 찔렸다. 대처는 이후 "당시 덩샤오핑의 제안은 천재적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렇게 반환 협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중요한 과정이 남아 있었다. 홍콩인들이 가지는 불안감이 문제였다. 반환 협상이 시작됐을 때부터 홍콩의 미래를 걱정한 사람들, 특히 재산을 가진 중장년층이 탈(脫)홍콩을 고민했고 실제로 이민이 잇따랐다. 혼란에 휩싸인 홍콩을 진정시키기 위해 덩샤오핑은 1987년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인들은 공산당을 비판할 수 있다. 다만 그런 말들이 행동으로 옮겨져 대륙에 저항하면 베이징은 간섭할 수밖에 없다." 나름의 가이드라인이었다. 이처럼 홍콩의 반환 과정에서 일국양제는 '하나의 중국'을 실현하는 묘수로 평가받았고, 홍콩을 넘어 대만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으로 중국 내에서 인정받게 됐다.

실패로 끝난 '우산운동' , 홍콩 사태의 잔불 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생각은 일정 부분 덩샤오핑의 생각과 닮았다. 홍콩 반환 이후 30여 년이 흘렀지만 시 주석 역시 일국양제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홍콩 사태에서 보듯 대륙에 저항할 경우 베이징이 간섭한다는 원칙을 확인한 점도 비슷하다. 다만 덩샤오핑과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 홍콩의 불안감을 종식시키기 위해 덩샤오핑은 '일국'만큼 '양제'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반면 시 주석은 양제보다는 일국을 우선시한다. 2017년 홍콩 주권 반환 20주년 행사에 참석한 그의 연설이 단적인 증거다. 핵심 내용은 일국양제였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원 차이나', 하나의 중국이었다. "홍콩은 전에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니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경계선을 넘지 말라"고 말했다. 대중 연설에 경고를 담은 드문 경우였다.

홍콩에는 오랫동안 항의의 역사가 있었다. 특히 1997년 이후 벌어진 시위는 정치적인 것일수록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었다. 항의의 대상은 당연히 중국 정부였다. 홍콩인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거에서 자유가 제한돼 있는 게 문제였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 시위였다.

중국 정부가 시위를 이전과 다르게 애국심 부족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건 2012~13년부터다. 2013년은 공교롭게도 시 주석이 취임한 해다. 당시 중국 정부는 친중 성향이 강한 홍콩 기득권층까지 반대한 렁춘잉(梁振英)의 행정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렁 장관의 등장은 베이징이 양제보다는 일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2012년 9월, 홍콩의 초·중·고에 '국민교육'이라는 교과목을 의무교육으로 도입한다는 계획이 나오면서 홍콩 청소년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반대 단체를 만들고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는 연일 수만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결국 베이징과 렁 장관은 "자신의 임기 동안 국민교육을 강제로 시행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히며 물러서야 했다.

이후에도 중국의 '일국'을 향한 시도는 계속됐다. 중국 정부는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민주파가 출마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해 '우산운동'을 불러왔다. 행정장관에 출마하는 예비후보들은 지명위원들의 복수 투표를 거쳐 50% 이상의 득표를 한 상위 2·3명만 최종 선거에 나설 수 있도록 조치했는데 지명위원 대부분은 친중국파로 구성돼 있었다. 홍콩의 우산운동은 79일간 계속됐지만 중국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고 우산운동은 실패와 좌절만 남기며 끝나 이번 홍콩 사태의 잔불이 됐다. 시 주석의 중국이 '양제'보다 '일국'을 강화하는 흐름에서 홍콩의 저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보여준 사례였다.

"중국의 의사 결정자들은 홍콩이 그들의 통치에 놓인 뒤 서서히 쇠락해 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고 있다. 베이징은 홍콩을 관대하게 대우했고, 특히 중국 본토와 지자체가 지불하는 세금과 수수료를 면제했으며 중국 본토의 주식이나 통화 시장에 특별접근권을 홍콩에 부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홍콩 경제를 지원해 왔다고 믿고 있다." 앤드루 나단 정치학 교수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 기고에서 베이징 상층부가 양제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양제'를 적절히 운영하고 있으며 홍콩에 이미 충분한 혜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홍콩인의 주장과 상반되는 지점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지금 홍콩의 시위대는 생떼를 부리는 이해 못 할 집단이 된다.

반면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바라보는 홍콩은 베이징의 인식과 온도 차가 있다. 차이 총통은 대만이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후퇴했던 젊은 시절에 대만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을 구하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던 일을 언급한 적이 있다. 차이 총통은 "50년(일국양제의 보장 기간)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동안 대만은 민주화됐지만 홍콩은 자유를 잃었다. 이제 책을 살 수 있는 곳은 홍콩이 아니라 대만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양제'는 사라지고 '일국'에 방점이 찍힌 시 주석의 일국양제는 굳건한 중국 통일의 원칙이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통일보다 분열의 원칙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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