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지소미아 종료 주장했던 청와대 참모들, 이라크 파병 떠올리기를

채병건 2019. 11. 27. 01: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한국갤럽이 19~21일 실시했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응답자의 51%가 ‘잘한 일’이라고 답했다. ‘잘못한 일’은 29%에 불과했다. 과반이 지소미아를 끝내는 데 대해 찬성했다. 그런데 지지 정당과 이념 성향으로 보면 찬반이 선명하게 갈린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의 78%가 ‘잘한 일’이라고 답한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자의 70%는 ‘잘못한 일’이라고 답했다. 보수라고 성향을 밝힌 응답자에선 ‘잘못한 일’ 57%인데, 진보 응답자에선 ‘잘한 일’ 79%였다. 청와대가 우여곡절 끝에 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했는데 이 여론조사로 보면 지지층 결집엔 그다지 도움될 일은 아니었다.

16년 전에는 이보다 더했다. 2003년 미국이 요구했던 이라크 파병을 놓고 여당에서 반대가 속출했다. 고(故) 김근태 의원이 “부도덕한 전쟁”이라 했고, 임종석 의원은 단식을 했다. 돌이켜 보면 이라크전은 명분도 실익도 없는 전쟁이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라크전에 공개 반대했고, 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쓸데없이 개입한 전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네오콘이 장악했던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파병 여부로 동맹 여부가 결판나는 순간이었다. 한국군을 파병하지 않으면 주한미군, 특히 북한군의 서울 진격을 막는 전방 2사단이 대규모로 이라크로 빠질 수 있었다. 임진강 너머 민통선 안엔 ‘캠프 그리브스’라는 미군 기지가 있다. 동북아의 최강 지상군 중 하나였던 2사단 내에서도 최강 전투력을 자랑했던 공중강습부대인 506보병연대가 있던 곳이다. 2004년 506연대의 1대대가 이라크로 떠난 뒤 다시는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파병 결정을 내렸다고 보수 진영이 표를 주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유예했다고 해서 보수층이 현 정부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 한들 정치적 득실이 아닌 국가적 득실로 국정을 결정하는 게 국민으로부터 국정 운영을 위임받은 집권 세력의 마땅한 자세다.

2003년 4월 2일 국회 본회의장에 선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 개혁, 노사 문화 개혁, 언론 개혁에 앞서 파병안 처리를 가장 먼저 꺼냈다. 취임 후 첫 국회 국정연설이었다. “저는 명분을 중시해온 정치인입니다. 정치 역정의 중요한 고비마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명분을 선택해 왔습니다. (중략) 그렇게 했던 제가 이제 이번에는 파병을 결정하고 여러분의 동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의 결정에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는 이날 공병·의료부대 파병안을 가결처리했다.

16년이 지난 지금 동북아 정세는 더욱 엄중해졌다. 북핵은 장거리핵미사일 단계로 치달았다. 부시 행정부는 돈 안 주면 동맹을 끊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트럼프 행정부에선 한·미 관계의 마지노선이 사라졌다. 일본과는 누가 이런 사태를 초래했느냐는 논쟁을 떠나 역대 최악이다. 사드 보복과 홍콩 시위 유혈 진압에서 드러났듯 중국은 이제 대놓고 억압적 대외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더욱 고압적으로 변한 중국을 옆에 둔 채 한·일 충돌 국면에서 미국마저 외교적 전면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지소미아 카드를 현실화했던 청와대 참모진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첫 국회 국정연설을 읽어보기 바란다. 노 전 대통령이 왜 지지세력의 이반이라는 심각한 정치적 상처를 무릅쓰고 이라크 파병에 나서는 결정을 했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지소미아를 언제든 종료할 수 있다는 얘기는 쉽게 입 밖에 꺼내지 못할 것이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팀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