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후손 "한국인들, 꼭 행복하셔야 합니다"

정현목 2019. 11. 2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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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이위종 증손녀 율리아
"이범진·이위종, 자랑스러운 선조"
이범진 전 러시아공사, 자결로 일제항거
엘리트 이위종, 연해주 항일 투쟁 주도
이위종 열사의 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 모스크바대 역사학부 교수를 역임한 그는 현재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한국인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 제 증조부를 비롯한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자신을 희생한 게 아닐까요?"
구한말 고종의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이었던 이위종(1887~?) 열사의 외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52) 전 모스크바대 교수는 '한국인들에게 바라는 점'에 대해 묻자 이같이 답했다.
증조부를 더 많이 기억해달라거나 기념사업을 벌여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저 한국인들이 많이 배우고 열심히 일하고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답변은 그래서 더 울림이 컸다. "후손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증조부 또한 원하고 있을 것"이란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국 식당에서 율리아 전 교수를 만났다. 이위종 열사가 러시아 귀족 출신 여성과 결혼하며 러시아인의 피가 섞여 외모는 러시아인에 가까웠지만, 강단있는 눈매와 말투는 증조부를 빼다박은 듯 했다.
그의 증조부 이위종 열사는 헤이그 특사로 함께 파견됐던 이준, 이상설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해 자결한 이범진(1852~1911) 러시아 주재 특명전권공사의 차남인 그는 젊을 때부터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파리 군사학교를 졸업해 프랑스어·영어·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그는 1907년 특사로 파견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각국 대표들과 해외 언론들에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세상에 부자와 빈자가 있듯이 강한 나라가 있으면 약한 나라도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모두 먹어치우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정의의 신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정의의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중략) 우리는 일본의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쳐서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돼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전세계에 알리고, 이후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이위종 열사 [중앙포토]

헤이그 특사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는 일본에 의해 궐석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헤이그 특사 활동에 이은 무장항일투쟁, 이위종 열사는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으로 꼽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고, 유족들도 2015년 한국 국적을 부여받았다.
율리아 전 교수는 "이위종 열사가 증조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척 기뻤다"며 "가족들이 선조인 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이위종 열사가 헤이그에서 했던 행동을 '역사적인 일'이라 평가했다.
"증조부의 헤이그 연설 덕분에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전세계가 알게 됐습니다. 국제사회가 한반도 문제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됐죠. 당시 증조부가 내 아들 또래인 22살이었는데, 내가 만약 그 나이에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증조부처럼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의 최연소 외교관이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가 제정러시아 장교·볼셰비키 혁명군 장교를 거쳐 연해주 의병활동 지도자가 되기까지, 이위종의 삶은 당시 격변했던 국제정세만큼이나 극적이고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든 이후의 행적과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등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항일독립투쟁을 했던 선조들의 영향으로 역사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대 역사학부 교수를 역임한 그는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보관소 등에서 증조부와 관련한 자료를 일부 찾아냈다고 했다.
"우연히 찾게 된 1919년 러시아 신문 기사에 따르면, 증조부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는 등 반일 시위를 주도하고, 고려인(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나 연해주 등에 정착한 한인)의 항일 운동을 독려했습니다. 한반도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3·1 운동이 모스크바 한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위종 열사의 일대기를 담은 책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이 지난 7월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연합뉴스]

이위종 열사는 러일 전쟁(1904~05년) 때 일본 관련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러시아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헤이그 특사 이후 거금을 들고 미국에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사오기도 했다고 율리아 전 교수는 설명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증조부의 자서전은 물론, 그가 몸담았던 볼셰비키 혁명군 부대명과 공산당원 번호까지 찾아냈다는 그는 "이를 토대로 1924년 이후 증조부의 행적을 찾아내 그가 이후 어떻게 항일 운동을 벌였고,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이위종 열사의 일대기『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을 발간한 저자 이승우 씨는 책에서 "이위종 열사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의 초기 계획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결로 일제의 불법적인 한반도 침탈을 전세계에 알린 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왼쪽)와 그의 둘째 아들 이위종 열사 [중앙포토]

율리아 전 교수는 이위종 열사의 아버지인 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범진·이위종 부자는 재산을 모두 의병 투쟁에 지원하면서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어요. 이범진 전 공사는 일제에 침탈당한 조국의 상황을 전세계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방법인 자살을 택했습니다.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처절한 심경이 이해가 갑니다."
율리아 전 교수는 "대한민국은 조국의 주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나라"라며 "선조들의 노고와 역사를 기억하는 나라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젊은이들이 항일운동가들의 희생과 역사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며 "내 아들 역시 이범진·이위종처럼 살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모스크바=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9 KPF 디플로마 '러시아전문가' 과정 참여 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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