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고교 윤리 교과서에 국민주권 대신 '인민주권'

표태준 기자 2019. 11. 30.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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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배포된 5種 중 3種서 사용.. 출판사들 "교육부 기준 따른 것"
"北이 쓰는 말 굳이 왜 넣나" 지적

"선생님, 인민(人民)은 북한말 아닌가요?"

고등학교 윤리 교사 A씨는 최근 학생들에게 '윤리와 사상' 과목을 가르치다 이런 말을 들었다. 올해 새롭게 배포된 교과서에서 '국민' 대신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A씨는 "작년까진 분명히 '국민'으로 가르쳤는데, 올해 보니 교과서 용어가 바뀌어 있어 나도 당황했다"며 "민주주의 주체를 굳이 인민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출판사 미래엔의 ‘윤리와 사상’ 교과서 4단원 ‘민주주의’의 한 부분. 국민이 아닌 인민이란 단어를 썼다. /미래엔

A씨 학교가 사용하는 교과서는 올해 배포된 출판사 미래엔의 '윤리와 사상'이다. 이 교과서 4단원 191페이지에는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배하는 통치 형태'라고 적혔다. 이어 '민주주의는 정치 공동체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고 인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이며 '민주주의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같은 인민주권의 원리'라고 기술돼 있다.

29일 본지가 올해 새롭게 배포된 '윤리와 사상' 검정 교과서 5종(種)의 각 4단원 '민주주의' 부분을 확인한 결과, 미래엔·비상교육·씨마스 등 3개 출판사의 교과서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교학사·천재교육 등은 '국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인민'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출판사들은 "교육부 집필 기준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가 2015년 개정한 교육과정 집필 기준은 민주주의 개념 교육과 관련해 "인민 주권의 원리에 기초하여" 기술하도록 권고한다. 2009년 교육과정 집필 기준에는 없던 대목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사회계약론'에 등장하는 'people'의 의미를 정확히 하기 위해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권고한 것"이라며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학사 '윤리와 사상'을 집필한 황인표 춘천교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한국 헌법에도 민주주의 주체가 인민이 아닌 국민으로 명시돼 있기 때문에 교과서도 이를 따르는 게 옳다고 집필진들과 합의를 봤다"며 "학자들이야 뜻을 구체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국민'과 '인민'이라는 표현을 분리해 쓰지만, 일반인 수준에서 그게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은 1948년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만들어질 때도 있었다. 제헌 헌법 초안 제2조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 있다. 하지만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인민은 북한에서 먼저 쓰고 있는 이념적 용어"라는 지적이 나왔고, 결국 '국민'으로 바뀌었다. 강규형 명지대 현대사 교수는 "한국에서는 국민과 인민의 개념에 이념성이 분명히 들어가 있어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는데 굳이 학계 용어를 학생들 교과서에 넣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민주주의의 주체를 북한처럼 인민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만 낳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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