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살인 20년 누명 쓴 윤씨의 삶

신호철 편집위원 2019. 12. 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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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윤 아무개씨(사진)를 '온종일 인터뷰'했다. 그는 그를 살아남게 한 힘이었던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저는 무죄입니다. 오늘은 너무 기쁜 날입니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옥살이를 했던 윤 아무개씨(52)가 11월13일 수원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며 밝힌 소감문 첫 문장이다. 이날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윤씨는 400m 떨어진 수원지방법원까지 걸어가 재심 청구서를 냈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그는 다리를 절면서 한 걸음씩 걸어 나갔고, 그 뒤를 기자들이 행렬을 이뤄 따랐다.

이틀 뒤인 11월15일, 경찰은 8차 사건의 범인은 윤씨가 아니라 수감 중인 이춘재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날 윤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 인사를 건네자 그는 담담히 “이제 시작이죠”라고 말했다.

11월17일 기자가 청주에 사는 윤씨를 찾아갔다. 온종일 인터뷰를 하려면 일요일만 가능하다고 했다. 16년 만에 다시 하는 인터뷰였다. 기자는 2003년 5월 청주교도소에 있던 그를 면회해 옥중 인터뷰 기사를 쓴 적이 있다(<시사IN> 제631호 ‘그때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기사 참조). 그의 억울함을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알린 기사였다.

ⓒ시사IN 신선영

16년 만에 다시 하는 인터뷰

“그 인터뷰 때문에 4일 동안 독방에 갔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독방에서 나온 뒤에는 기사를 보고 달려온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들의 추궁에 시달렸다. 나중에 모범수 심사 때도 무죄를 주장했다가 독방 간 이력 때문에 승급이 미뤄졌다고 한다. 기자가 사과를 하자 “아니에요. 오히려 그 기사가 재심에 도움을 줄 것 같아요”라며 고맙다고 했다. 옥중 인터뷰 기사는 재심 청구서에 근거자료로 붙여졌다.

교도소 시절 그를 면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이래 부모 없이 자랐다. 이런 배경은 화성경찰서 형사들이 그를 희생양으로 삼게 된 원인이 되었다. 고아에 다리를 저는 그는 아마 마을에서 가장 힘없는 청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대해 더 물어봤다.

“어머니는 제 다리를 고치려고 별 약을 다 쓰셨어요. 그래도 낫지 않자 자립심을 키우려고 애쓰셨죠. 손도 잡아주지 않고 혼자 걷고 혼자 일어나도록 가르쳤어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대학을 나오고 공무원까지 했다는 아버지는 어머니 교통사고 보상금을 다 날리며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들은 얘기로는 노름에 빠졌다고 했다. 가출한 아버지가 서울역 노숙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3녀1남이 친척들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고, 초등학교 3학년이던 윤씨는 학업을 포기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데만 무능한 것이 아니라 윤씨처럼 어려움에 빠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도 철저히 무능했다.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던 윤씨는 한 음식점 사장의 권유로 경기도 화성에 와서 요리점 잡일을 했다. 불편한 다리가 문제였다. 배달은 느렸고 음식을 쏟기도 했다. 이후 튀김요리 식당 일도 했지만 걷다 넘어져 손님에게 기름을 뿌리는 실수를 하고 쫓겨났다. 여섯 달 동안 노숙 생활을 하며 거리에서 구걸도 했다. “그냥 거지였다.”

만 열한 살 때 화성의 경운기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웠는데 이후 10년간 경운기 정비공으로 일했다. 윤씨는 성실했고 평판이 좋았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경운기 정비소 사장이 됐을지도 모른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다.

ⓒ시사IN 신선영소아마비 장애인이고 부모가 없는 윤 아무개씨는 살인사건 범인으로 누명을 썼다. 위는 11월13일 윤씨가 기자회견에서 소감문을 낭독하는 모습.

1986년부터 마을에서 이상한 살인사건이 잇달아 났고 흉흉한 소문이 이어졌다. “뉴스에서는 경찰이 살인범을 잡았다고 했는데 얼마 안 가 또 살인이 일어났죠.” 그러다 1988년 6월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이 터졌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음모를 발견했다며 대조를 위해 마을 사내들의 음모를 뽑고 다녔다. 윤씨 자신은 6번이나 제출했다고 한다. 왜 자꾸 요구하느냐고 물으니 ‘전에 것을 잃어버려서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1989년 7월25일 경운기 정비소 사장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잠깐만 얘기하자’라는 말에 끌려 나갈 때는 20년 후에야 돌아오게 될 길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 주변을 경찰 수십 명과 경찰버스 두 대가 군사작전을 하듯 포위하고 있었다. 봉고차에 태워진 윤씨는 태안지서(현 태안지구대)에 잠깐 들렀고 이후 다시 인근 야산으로 끌려갔다. 오산읍 양산리에 있는 그 산 일대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씨가 소유한 큰 농장과 별장이 있었다. 형사들은 그 별장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끝나는 곳까지 윤씨를 태우고 갔다(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 정부가 산을 깎아 만든 이른바 ‘전두환 헬기장’이 있었다). 윤씨와 형사들은 그 헬기장 근처에서 20분간 머물렀다고 한다.

거기서 형사들은 윤씨에게 수갑을 채우고 화성경찰서로 데려갔다. 이후 경찰의 가혹행위가 이어졌다고 윤씨는 증언한다. 형사들은 7월25일 저녁부터 26일 새벽까지 소아마비인 윤씨에게 ‘쪼그려 뛰기’와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켰다. 당연히 그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넘어졌고 폭력이 뒤따랐다. 발로 차고 가슴을 때렸다. 겨우 일어났더니 눈앞이 번쩍번쩍했다고 한다. “얼굴을 맞고, 여기저기를 맞았는데 정신이 없어 정확한 과정이 잘 기억 안 나요.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어요. 나보고 살인을 자백하라는데 난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데….”

7월26일 언론에 ‘용의자, 범행 자백’ 뉴스가 쏟아졌다. 경찰 진술조서에는 그가 7월26일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체포 이후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진행했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으면 형사들이 돌아가며 깨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목이 타서 물을 달라고 하면 물을 주지 않고 자백을 강요했다. 이런 가혹행위가 7월28일 자정 무렵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계속됐다. 결국 윤씨는 허위 자백을 하게 된다. 포기를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네가 여기서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다’는 협박이었다고 한다. 그 협박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윤씨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유도 없었을 터이다.

“문익환 목사와 그의 제자가 도와줬어요”

그렇게 기소가 되고 재판이 시작됐다. 윤씨는 돈이 없어 국선변호사를 썼는데, 변호사 얼굴도 못 봤다. 법정 멀리서 변호사를 어렴풋이 보기는 했는데 주변이 시끄러워 그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뭐가 뭔지 정신없이 흘러가는 사이 1989년 10월20일 1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윤씨는 그냥 “사형이 아니라는 데 안도”했다. 1심 판결 이후 윤씨는 무죄를 적극 주장했다. 검사를 만날 기회가 생기자 재수사를 요구했는데 그 말을 들은 검사의 반응은 옆에 있던 계장에게 “쟤, 보내라”는 한마디뿐이었다.

경찰, 검찰, 국선변호사, 판사 등이 윤씨를 외면할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교도소에서 만난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안양교도소에 있을 때 문익환 목사가 옆 방에 수감되어 있었어요. 문 목사와 그 제자들이 저를 도와줬어요.”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어느 날 문 목사가 나를 부르는데 이미 내 사건을 다 알고 있더라고요. 재판 자료를 다 달라고 해서 드렸죠. 문 목사가 수감 중인 제자를 불러서 같이 보자고 권했어요. 그 제자라는 분이 항소이유서랑 탄원서를 써줬어요. ‘그 제자’가 아주 구체적인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인으로 홍씨를 부르라고 알려줬어요. 그 덕분에 증인 신청을 할 수 있었죠.” 홍씨는 경운기 정비소 사장 동생으로 사건 당일 밤 윤씨와 같이 방에서 자고 있었다. 윤씨가 그날 밤 비좁은 방을 나갔다면 홍씨가 모를 리 없었다. 윤씨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인이다. 변호사가 할 일을 ‘문익환 목사 제자’가 대신 한 셈이다. 윤씨는 그때 자신을 도와준 문익환 목사와 그 ‘제자’가 너무 고맙다면서 “결코 잊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윤씨가 기억하는 ‘문익환 목사 제자’는 누구일까. 윤씨는 “40대 중반의 조씨 성을 가진 분”으로 “그분 스스로도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설명에 들어맞는 유일한 사람은 조성우(당시 49세) 겨레하나 이사장이다. 당시 평화연구소 소장이었던 조 이사장은 문익환 목사와 같은 시기에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1990년 4월까지 있었다. 조성우 이사장은 “솔직히 윤씨를 도와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30년 전 일이지 않은가”라면서도 “당시 교도소에서 만난 여러 재소자들의 항소이유서 작성을 도와주고 법률 상담을 해준 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고려대 행정학과를 나온 조 이사장은, 과거의 수감 경험 등을 통해 재소자에게 법적 조력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조 이사장은 “항소이유서나 탄원서를 써줄 때는 당사자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를 봤다. 아무나 도와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11월13일 윤씨가 기자회견에서 낭독한 소감문 (사진)은 인생의 여러 은인들에 대한 감사로 채워졌다. 특히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진했다.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윤씨가 원주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누가 자신을 찾아와 “문익환 목사님에게 전해 들었다”라면서 자신의 상고이유서 작성을 도와줬다는 것이다. 국가가 윤씨를 질식시키고 있을 때 그에게 손길을 내민 존재가 당시 ‘국가의 적’인 양심수였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2심(1990년 2월)과 대법원(1990년 5월)은 윤씨의 항소와 상고를 기각했다. 무기징역이 최종 확정됐다. 기나긴 수형 생활이 시작됐다. 옥살이는 쉽지 않았다. 장애인인 그는 특히 교도소 화장실 사용이 힘들었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변을 보는데, 빨리 나오라는 재촉에 다급히 몸을 추스르다 그만 재래식 변기 위로 철퍼덕 주저앉아버리는 일도 있었다. 관련된 여러 일화는 듣는 이를 비참하게 한다. “독방에서 잠자는데 화장실에서 쥐가 나와서 돌아다녔어요. 고양이만 한 쥐인데, 똥 묻은 쥐 발자국이 장판 여기저기 남아 있었어요. 그 쥐는 천장 위로 올라갔는데, 며칠 동안 그 똥쥐와 함께 살았어요.”

겨우 교도소 생활에 적응하고 5년쯤 지났을 때는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시달렸다. “어쩔 수가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 체념과 달관으로 마음을 다잡고 모범수의 길을 걸었다. 교도소에 딸린 공장에서도 성실히 일했다. 2000년 윤씨는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받았다. 2003년 기자와의 옥중 인터뷰 사건 등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결국 윤씨는 1급 모범수가 되었다. 그리고 2009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스물두 살 청년은 80만원가량을 손에 든 마흔두 살의 전과자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 가족이 없던 윤씨를 받아준 곳은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교정위원으로 만난 나호견 원장이었다. 나 원장은 출소자 재활 운동을 위해 ‘뷰티플라이프’라는 교화복지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단체가 관리하는 청주 시내 3층 단독주택에 출소자 10여 명이 모여 산다. 이 ‘출소자의 집’에 살게 된 첫날 윤씨는 나 원장에게 “세상 모두가 날 살인범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난 진짜 아니다. 원장님 한 명이라도 내 말을 믿어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호소했다. 나 원장은 충격을 받았고 둘이 같이 울었다고 한다. 윤씨는 3년을 ‘출소자의 집’에서 지냈고 이후에도 바로 이웃집에 자리를 잡아 아직까지 살고 있다. 나 원장은 “그는 자신의 결백을 지난 10년간의 사회생활로 증명했다. 월급의 반을 저축하고, 술을 먹지 않고, 밤 10시까지 귀가하는 등의 규칙을 그는 3년 동안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어떻게 강간 살인을 했다는 사람이 충동을 억제하고 그런 인내심과 자제력을 보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춘재의 자백 소식에 ‘걱정’이 앞선 이유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이라는 것도, 인터넷이라는 것도 낯설었다. 윤씨는 청주의 한 카시트공장에서 주야간 교대근무 노동자로 일했다. 공장 사장과 동료에게 전과자라는 사실은 철저히 숨겼다. 갈등도 있었지만, 언제나 윤씨가 그랬듯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과거를 잊으려 애썼고 정말 잊히는 듯했다. “한번은 지방선거가 있어서 투표장에 갔는데, 담당자가 투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유는 말 안 하고 그냥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잊고 싶다고 해서 전과자라는 딱지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이춘재의 소식을 들은 것은 출소 뒤 10년이 지난 올해 9월이었다. 처음에는 희소식이 아니었다. 겨우 자리 잡았는데, 괜히 들쑤셔 피해가 올까 걱정했고, 제발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얼마 뒤 경기지방경찰청에서 형사들이 찾아와 8차 사건에 대해 물었다. 이번 경찰은 과거 화성경찰서 형사들과는 달랐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재수사를 해보겠다. 끝까지 파보겠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10월4일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춘재가 8차 사건을 시인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다음 주부터는 기자들이 집 앞에 몰려오기 시작했고, 창문을 두들기는 기자도 있었다. 며칠간 집을 나와서 살았다. 아직도 윤씨 여동생 중 한 명은 오빠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직은 이름과 얼굴 공개를 미루고 싶다.

ⓒ시사IN 신선영윤씨는 소아마비로 왼쪽다리를 절면서 걷는다. 30년 전 경찰은 이런 그가 피살자 집 담을 훌쩍 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금을 받더라도 공장 일은 계속할 거라고 말했다. 물론 그 어떤 보상금도 그의 청춘을 되돌려줄 수는 없다. ‘그 일’이 없었다면 윤씨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돈도 모았을 거다. 결혼도 했겠죠. 그러면 자식들도 생겼을 거고….”

자기 인생을 앗아간 이들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다. 마음 깊은 곳에 억울함과 분노가 있지 않을까? 윤씨는 끝까지 기자가 예상한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 시대는 분명히 뭔가 잘못됐죠. 하지만 과거를 원망해서 뭘 어쩌겠어요.”

그는 어머니 가계를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가 친척과 연락이 끊겼는데, 지금이라도 외가 쪽 친척을 만나 어머니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충청북도 진천이 고향인 박금식씨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제 와 어머니의 흔적을 찾는 게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인터뷰 시작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늘 말했어요. ‘혼자 일어나라. 힘들어도 너 스스로 일어나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 가혹한 시대에 윤씨를 살아남게 한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사IN 신선영

신호철 편집위원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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