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 앞둔 책 50만권 잿더미 '출판 재난'..영세 출판사 "보험도 안 들었는데" 패닉

허진무 기자 2019. 12. 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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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파주 배본사 물류창고 지난달 화재로 ‘날벼락’

지난달 29일 전소된 경기 파주시 북스로드 물류창고의 모습을 30일 촬영했다. 꽃신출판사 윤재진씨 제공

보관·배송 대행 ‘북스로드’

피해 1인 출판사만 40여곳

화재보험은 보상 금액 낮고

물류비 인상 부담, 가입 꺼려

재인쇄 여력 없어 발 동동

“지자체, 작은 지원이라도”

경기 파주시의 한 배본사 물류창고에서 일어난 불로 책 50만권이 잿더미가 됐다. 이 배본사에 책을 맡긴 영세 1인 출판사 40여곳은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없다. 배본사와 출판사는 모두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경기 파주경찰서는 지난달 29일 오전 5시쯤 경기 파주시 월롱면에 있는 배본사 ‘북스로드’의 물류창고에서 일어난 화재로 495.8㎡(150평)짜리 창고 2동이 전소됐다고 3일 밝혔다. 물류창고에서 시작한 불은 옆 제조업체 창고까지 옮겨붙었다. 북스로드에 따르면 보관된 책 약 50만권이 소실됐다. 추정 손실액은 약 50억원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지난 2일 합동 감식을 진행했다.

배본사는 출판사를 대신해 책을 보관하고 서점에 배송하는 업체다. 북스로드는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북스로드와 계약한 1인 출판사 대부분도 화재보험이 없다.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판업계에 따르면 책은 화재에 취약해 높은 보험료에 비해 낮은 보상금을 받는다. 대부분의 배본사와 출판사가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는다. 화재보험에 가입한 일부 대형 배본사는 출판사에 높은 배본료를 매긴다. 북스로드가 1인 출판사들에서 받은 배본료는 월 10만~15만원이다.

북스로드 대표 이모씨(42)는 이날 통화에서 “화재보험을 가입하더라도 피해 보상금액이 턱없이 부족하고 매달 내야 하는 보험료 수십만원을 감당하기 힘들다”며 “보험료를 더하면 배본료를 월 20만원 이상 받아야 하는데 1인 출판사들이 낼 수 있겠느냐. 불이 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세 번을 다시 태어나도 만져보지 못할 돈이 손실액이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영세한 1인 출판사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제 돈을 들여 책을 새로 인쇄해야 한다. 당장 배송을 맡아줄 다른 배본사를 찾아 헤맨다. 1인 출판업계에서는 책이 월평균 200부 이상 팔리면 ‘베스트셀러’ 평을 듣는다. 책값엔 서점수수료, 제작비, 인세 등이 포함된다. 출판사 수익은 책값의 20~30% 수준이다. 월 배본료 ‘10만원’도 이들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다.

수학 참고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송모씨(55)는 “남편이 학원 강사를 하며 30년 동안 다듬어 책을 내놨다. 이제 막 입소문을 탔는데 9000권이 빛도 못 보고 사라졌다. 당장 책을 새로 찍을 여력이 없어 넋을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송씨는 “북스로드가 보험을 든 줄 알았는데 없었다. 1인 출판업계에서는 보험 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며 “국가 차원에서 의료보험처럼 화재보험을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집 전문인 꽃신출판사를 운영하는 윤재진씨는 화재 소식을 들은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급히 창고를 찾았지만 새카만 물에 축축하게 젖은 종이뭉치들만 확인하고 망연해했다. 사진집과 여행에세이 4500권을 잃었다. 피해 출판사 20여곳이 모여 대책을 논의 중이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윤씨는 “책을 보관하고 관리를 위탁하는 것이니 당연히 배본사에서 보험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경기도)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답답하고 깜깜해요.”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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