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北 으름장에 '말값'도 못하는 청와대

김진명 정치부 기자 2019. 12. 10.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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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못 돌이킨다"더니 미·북 말폭탄 재개엔 침묵
북핵 없는 평화를 약속했던 '말값'은 누가 치를 것인가
김진명 정치부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협상 시한'으로 정한 연말이 다가오면서 재개된 미·북 간의 말싸움은 9일 더욱 격렬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하자, 북한은 지난해 미·북 협상의 핵심이었던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을 다시 내세워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받아쳤다. 한때 연서(戀書) 같은 친서를 주고받던 미·북 정상의 친분이 진실의 순간을 맞아 순식간에 빛바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장 무겁고 기묘하게 느껴졌던 것은 청와대의 침묵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이 폐기되면 북의 ICBM 발사 능력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린다"(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고 했던 청와대는 북한이 그곳에서 '중대 시험'을 단행했다고 밝힌 8일 무척이나 말을 아꼈다. 분명 국가 안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인데 웬일인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평화의 전도사'인 아일랜드 출신 록가수 보노를 접견하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해 무슨 복안을 내놓을 것이란 예측도 있었지만 여지없이 틀렸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남북 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메시지를 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다"는 정도에 머물렀다.

사실 미·북이 말폭탄을 주고받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무슨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영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자칫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처럼 보이거나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고려를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침묵을 꼬집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동안 스스로 쏟아놓은 '말값'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평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작년 초부터 미·북이 스톡홀름에서 실무협상을 가진 지난 10월 즈음까지 청와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다. 작년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비핵화의 입구'에 해당하는 핵 신고조차 거절했을 때 이미 장기간의 교착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평화'를 얻어냈노라는 자랑은 멈출 줄 몰랐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중재 성과의 '불가역성'에 대한 과시였다. 작년 이맘때쯤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불러모은 정 실장은 "올해 외교 안보 분야의 가장 큰 업적은 한반도에서 전쟁 위협을 없앴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한도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고 본다"고 했다. 불가역성을 자랑한 것은 청와대만이 아니었다. 작년 9월 평양을 방문한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공동선언을 발표하자, 여당(與黨)은 "이번 합의로 한반도는 되돌릴 수 없는 평화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했었다.

2월 하노이 정상회담장을 빈손으로 떠난 김정은이 연말까지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지난 4월 이후에도 정부·여당의 입찬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평양 공동선언 1주년을 맞은 지난 9월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평화가 실현됐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밝혔다는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과 문서 몇 줄로 약속한 평화의 불가역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목 잡기'를 한다는 부당한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평화를 바라지 않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북핵이 남아있는 한 우리 안보의 근본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생산하는 동안에도 평화가 왔노라고 외쳤던 사람들의 '말값'은 누가 어떻게 치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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