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리벤지'도 '포르노'도 없다

이옥진 국제부 기자 2019. 12. 12.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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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진 국제부 기자

미국 민주당의 촉망받던 '수퍼 루키' 케이티 힐(32)은 지난 10월 의원직을 사퇴했다. 인터넷에 그녀의 나체 사진이 도배된 지 나흘 만이었다. 몇 장의 사진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녀는 이혼 소송 중인 그녀의 남편이 사진 유출의 배후라고 지목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나를 떠나면 네 인생을 망치겠다"고 협박해왔기 때문이다. 미 언론은 그녀를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graphy)'의 피해자라고 했다.

리벤지 포르노란 '헤어진 연인에게 보복하기 위해 유포하는 성(性)적인 사진이나 영상 콘텐츠'를 말한다. 그러나 리벤지 포르노라는 말은 잘못됐다. 힐을 포함해 수많은 피해자가 당한 것은 리벤지(보복)도 포르노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복은 어떤 잘못한 일에 상응하는 앙갚음이다. 힐이 남편에게 어떤 해를 끼쳤다는 걸까. 일각에서는 그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불륜을 저지른 사람은 나체 사진이 공개돼도 괜찮다는 건가. 불륜에 대한 보복을 원했다면 이혼이나 위자료 청구 등 법적 절차를 거치면 된다. 포르노란 말도 문제다. 동의하에, 또는 몰래 촬영된 한 개인의 사진이 단지 알몸 사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음란물인가.

스물셋에 결혼한 힐은 남편에게 여러 차례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네 인생을 망치겠다"고 협박하며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6월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후과는 가혹했다. 그녀는 "수백만 명이 내 알몸 사진을 봤고, 모든 게 무너졌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웠다" "완전히 홀로 어두운 마음속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특히 자신을 믿어준 이들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비슷한 피해를 본 피해자들도 힐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그들은 그저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일 뿐이다.

미 비영리단체 사이버시민권보호기구(CCRI)의 2014년 보고서에 따르면,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 51%가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 중 일부는 실제 자살에 이르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가수 구하라가 옛 연인으로부터 성관계 동영상 유포 협박을 받아 괴로워하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힐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멈춰 섰다. 그녀는 어리고 젊은 여성들을 위해 투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리벤지 포르노란 말보다 '사이버 착취(Cyber Exploitation)'란 말을 쓰겠다고 했다. 자신이 당한 일은 리벤지도 아니고, 유포된 사진이 포르노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미권에서는 '이미지 기반 성적 학대' '성적 이미지의 비동의 유포' 등도 리벤지 포르노의 대안적 개념으로 거론된다.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다. 투사 케이티 힐의 승리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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