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고 형광펜으로 '쓰윽'.. 도서관에 남겨진 비양심들 [김기자와 만납시다]

김동환 2019. 12. 1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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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이 가득하다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요?”

직장인 이모(34)씨는 최근 동네의 한 구립도서관에서 사회학 도서를 빌렸다가 밑줄 범벅인 책에 기분만 상했다며 이같이 물었다. 그는 “도서관 책은 여러 사람이 함께 오랫동안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밑줄 긋기는 오로지 자기 편의만 생각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씨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고 부족한 시민의식을 지적했다.
서울의 한 공공도서관이 지난 11일 공개한 훼손 도서 표본. 형광펜 밑줄에 일부 책장이 뜯긴 도서(빨간 동그라미)도 보인다.
13일 문화체육관광부 국가도서관통계시스템에 따르면 대학도서관이 아닌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등이 설립·운영 주체인 공공도서관은 2014년 930곳에서 △978곳(2015년) △1010곳(2016년) △1042곳(2017년) △1096곳(2018년)으로 매년 꾸준히 늘어났다. 도서관 증가에 발맞춰 지난해 국민 1인당 장서도 전년(2017년·2.03권)보다 증가한 2.15권이다. 독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미국의 2.4권(2017년 기준)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독서 환경 개선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시민의식 탓에 장서 훼손 등의 이용 불편을 호소하는 사례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눈에 띈다. 이에 이용객의 도서 취급 실태를 알아보고자 지난 11일, 일일 대출 400권에 장서 50만권 규모인 서울의 한 공공도서관을 방문했다.

◆밑줄 기본에 ‘형광펜’ 그리고 뜯긴 낱장까지…증명 어려워 ‘변상 규정’도 무용지물

도서관은 이날 훼손 사례로 경제·역사 도서 다섯 권을 공개했다. 책장을 넘기니 샤프로 밑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군데군데 표시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한 역사 도서는 책장이 낱낱이 분리돼 정상적으로 넘길 수 없는 상태였고, 또 다른 책은 이용자가 흘린 커피 자국으로 책장이 쭈글쭈글했다.

도서관 직원 A씨는 “공공 자산을 개인 물건처럼 다루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예전에는 그림이 예뻤는지 삽화가 있는 페이지를 찢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낱장으로 뜯긴 책은 제본용 스테이플러로 고치는데, 그러면 책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아 글자를 보기 어렵다”며 책상 구석에 놓인 스테이플러와 접착제 등을 ‘수리 도구’라고 가리켰다. A씨는 “차라리 샤프는 지우개로 지울 수라도 있어서 편하다”고 했다.
서울의 한 공공도서관이 지난 11일 공개한 훼손 도서. 이전 이용객이 샤프로 밑줄 그으며 책을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도서관 측은 훼손·분실 도서와 관련, 새 책으로 받거나 같은 액수로 변상한다는 내부 규정이 있지만 실제 변상은 분실 도서에 거의 한정된다고 밝혔다. 이용객을 의심한다는 시선 탓에 대면 반납 시 일일이 훼손 여부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고, 무인반납기계에서 훼손 도서를 발견해도 직전 이용객이 “내가 안 했다”고 주장하면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분실 도서는 시중에 있는 새 책이나 책값과 같은 액수의 돈으로 받는다며, 만약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이면 같은 도서를 구매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A씨는 “도서관이 자체 집계한 올해의 ‘사용불가 도서’는 총 1만4933권”이라며 “형광펜 표기 등을 포함해 훼손·오손(汚損)도서는 약 42%에 해당하는 6232권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나머지는 책 내용이 시의성을 벗어나는 등의 이용가치가 떨어진 도서라고 한다.

도서관은 논의를 거쳐 이달 안에 사용불가 도서 전량을 폐기하며, 내년 새 책 구매 예산안으로 2억여원을 책정했다. 한 권당 1만5000원이라 가정하면 약 1만4000권을 새로 사는 셈으로, 폐기 도서량 규모와 비슷하다.
서울의 한 공공도서관이 보유한 ‘제본용 스테이플러’. 낱장이 뜯긴 책은 스테이플러로 고치지만, 책장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아 글자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책 소유주는 공공도서관…장서 훼손은 ‘재물손괴’ 해당할 수 있어”

법조계에서는 공공도서관 장서 훼손이 ‘재물손괴’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본다. 지난달 법률방송에서 공공시설 낙서가 ‘재물손괴’에 해당한다고 밝혔던 박민성 변호사(법무법인 에이스)는 통화에서 “장서 소유주는 도서관”이라며 “책의 효용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는 ‘타인의 재물’을 손괴하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다만, 어느 행위까지 재물손괴 범위로 볼지는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부연했다. 형법 제366조(재물손괴 등)는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의 효용을 손괴 또는 은닉 등의 방법으로 해한 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글·사진=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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