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불타버린 1인 출판사의 꿈.. 50만권 보관했던 창고 불타

이복진 입력 2019.12.15. 12:02 수정 2019.12.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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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오전 5시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경기 파주시 북스로드 물류창고와 불에 타고 물에 젖은 책들. OBJMEDIA 제공
“처음엔 보관 중이던 책이 다 탔다는 걸 믿지 못했어요. 장난치는 줄 알았죠. 책을 맡겼던 배본사 창고가 불에 탔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요.” (김찬웅 OBJMEDIA 편집장)

배본사(책을 보관해주고 유통하는 업체) 중 한 곳인 파주의 ‘북스로드’ 물류창고에 자신의 저서 2종 1100여권을 보관 중이다가 창고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1인 출판사 OBJMEDIA의 김찬웅 편집장은 지난 12일 서울 한 카페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이같이 하소연했다.

김 편집장은 자신의 책을 북스로드 물류창고에 맡겨 판매해왔다. 그런데 지난달 29일 물류창고에 불이나 보관 중이던 책이 타거나 물에 젖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배본사에 책을 맡긴 1인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사는 김 편집장을 비롯해 50여곳이다. 현재 화재 발생 보름이 지났지만, 피해 출판사들은 피해 보상을 받지 못했다. 배본사와 출판사 모두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0만여권, 화마에 휩싸여...50억원어치 책이 잿더미로  

출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5시쯤 경기 파주시 월룡면에 있는 배본사 북스로드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창고 2층에서 밀린 연말정산 업무를 하던 북스로드 A 대표가 경보를 듣고 1층에 내려와 화재를 막으려 했으나, 이미 불은 창고 전반으로 번져 몸만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불은 오후 1시가 돼서야 모두 진압됐지만 창고에 보관 중이던 책 50만여권이 모두 타거나 물에 젖어, 팔수 없는 상태가 됐다. 책 정가를 1만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피해 금액은 50억원에 달한다. 제작단가(정가의 20~30%)를 고려해도 20억원이 넘는 피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지난 2일 합동 감식을 진행했지만, 명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르면 이번 주중 감식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 출판사들, 화재 사실도 몰랐다...네이버 카페 통해 겨우 알기도 

북스로드에 책을 맡겼던 50여 1인·소규모 출판사는 화재 사실을 바로 알지 못했다. 일부는 화재 당일 오후 4시 31분에 A 대표가 네이버 카페 ‘1인출판 꿈꾸는 책공장’에 ‘[긴급알림]북스로드 물류창고 화재’란 글을 올리고 나서야 화재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김 편집장도 화재가 발생한 지 사흘 뒤인 지난 2일 우연히 ‘1인출판 꿈꾸는 책공장’에 접속해 북스로드 화재 사실을 알았다. 김 편집장은 “A 대표한테서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라며 “휴대폰이 불타 연락처가 없다고 하지만, 배본 프로그램에 거래처 연락처가 있을 건데도 연락을 못 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김 편집장은 네이버 카페에 자주 접속하는 일부 출판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사고 당일 화재 사실을 몰랐을 것으로 추측했다. 출판사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고 별도의 모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재 소식이 늦게 알려진 것이다.

피해 출판사들은 지난 2일 ‘북스로드, 그리고 출판사 모임’이라는 네이버 카페를 긴급 개설해 피해 대책을 논의 중이다. 현재까지 68곳이 가입했지만 피해 출판사 전부가 가입했다고 보기 힘들다. 김 편집장은 “피해 출판사는 이 대표만 알고 있어서 네이버 카페에 모두 가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보상 받을 길 막막한 출판사

피해 출판사들로선 현재 피해 보상받을 뚜렷한 방법이 없다.

피해 출판사 대부분 10종 내외의 책을 출판하는 1인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사로 규모가 크지 않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매달 5만∼10만원 가량 지출되는 보험료조차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북스로드 역시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화재보험에 가입할 경우 월 10만원가량의 기존 배본료를 유지할 수 없다. 보험에 가입하면 월 20만원 이상, 2배 가까이 배본료를 올려야 한다. 이 경우 다른 배본사와 비용면에서 경쟁력에 밀린다. 또한 배본사 화재가 드물었던 점도 화재보험 가입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했다. A 대표에 따르면 가장 최근 배본사 물류창고 화재는 7년 전에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출판사와 배본사 모두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탓에 양측 모두 피해보상받을 길이 현재로선 없다.

피해 출판사는 북스로드 측에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나, 북스로드가 피해 보상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A 대표는 지인의 도움으로 북스로드보다 소방시설이 잘 구비돼 있는 배본사 물류창고에 북스로드 때 받던 비용으로 책을 맡기는 방안을 피해 출판사들에 제안한 상태다. 또 피해 출판사들이 업무를 하는 데 도움이 필요할 경우 지원하기로 했다.

A 대표는 “숙식조차 창고에서 할 정도로 전 재산을 투자해 북스로드를 운영 중이었는데, 이번 화재로 모든 것이 다 타버렸다”라며 “현재 금전적으로 보상해드릴 수 있는 게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보상해드릴 수 있는 건 앞으로 일을 해서 보상해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출판 관련 단체들과 지원 방안 협의 중”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윤철호 회장과 류원식 정책담당 상무이사 등 출협 관계자는 지난 10일 피해 출판사 일부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피해 출판사는 도서관 공동 구매, 피해액 보상 등을 요청했으나 출협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후 출협은 출판 관련 단체들을 상대로 지원 방안을 협의 중이다. 출협 관계자는 “여러 방면으로 피해 출판사를 지원하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다”며 “출판 관련 단체들과 협의 중이며 조만간 긍정적인 지원 방안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거의 전부인 책을 읽어버린 1인·소규모 출판사들은 이 말에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이복진 기자 b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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