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배부른 돼지와 굶주린 늑대의 경쟁.. 文정권에서 북한 우위로 역전돼"

최보식 선임기자 2019. 12. 16. 03:1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사파 리더→대기업 북한담당상무→국정원 북한담당기획관..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
北간부 "김정일이 보고 싶어한다"
지하당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 '논의할 게 없다' 거절로 언쟁 붙어
국정원 가장 큰 문제는 정치 오염
보수정권서 '대통령 맞춤형 보고'.. 文정권에서도 맞춤 정보만 생산

“한국은 경제적으로만 앞서 있을 뿐 군사·외교적으로 ‘핵(核) 국가’ 북한에 추월당했다. 배부른 돼지와 굶주린 늑대의 경쟁으로 비유될 수 있다. 한반도의 주인은 문재인이 아니라 김정은이고, 김정은이 문재인의 국정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구해우(55) 미래전략연구원장이 '미중패권전쟁과 문재인의 운명'을 출간했다. 그는 한때 대학 운동권을 지배했던 주사파 지하 조직 '자민통(자주민주통일)'의 리더였고, 구속 수감과 전향을 거쳐 SK텔레콤 북한담당 임원으로 세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원 북한담당기획관으로 일했다.

"문 정권의 실세 90%가 '얼치기 친북 친중 좌파'다. 나는 이들의 머릿속을 너무 잘 안다. 이들은 권력을 잡는 데는 수단과 방법 안 가리지만 국가 경영에는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 문제 해결 능력도 없다."

―고려대 법대 재학 시절 본인이 조직한 '자민통'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1988년 말~1991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배후 조종한 지하조직이었다는데?

"주사파 조직 간에도 헤게모니 싸움이 있었다. 1987~1988년에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인자였던 '반미청년회'가 대학 운동권을 지배했다. 이인영 원내대표, 우상호 의원,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그 영향을 받았다. 1988년 말 자민통이 반미청년회를 누르고 주사파 운동권의 주류가 됐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 김경수 경남지사가 자민통 출신이다. 자민통이 배출한 전대협 의장 중에는 송갑석 의원이 있다."

―전대협 의장이나 명문대 총학생회장 출신은 감옥에 한번 다녀온 유명세로 일찍 정치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의 속성은 한마디로 '출세주의'다. 지하조직의 핵심부는 어쨌든 마르크스든 주체사상이든 공부를 많이 했지만 '얼굴마담' 운동권은 그런 내공은 없었다. 기껏 '해방전후사'나 '전환시대의 논리', '태백산맥' 같은 몇 권의 책을 본 것뿐이다. 권모술수의 실용서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 '손자병법'도 읽었을 것이다."

―이 '586' 세대는 이제 우리 정치·사회를 왜곡시켜온 '기득권 패거리'로 비판받고 있는데?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소위 '먹을거리'를 알게 되면서 자기들끼리 이익집단화됐다. 권력을 잡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니 '울산시장 선거 개입'도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위선과 이중성, 조직폭력배식 패거리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거의 괴물처럼 됐다."

구해우씨는 “일찍 정치판에 들어간 얼굴마담 운동권들의 속성은 ‘출세주의’다”라고 말했다.

―정권 실세들에게 이념 문제를 지적하거나 전향(轉向) 여부를 물으면 '구시대적 색깔론'이라고 반격하는데.

"한반도 분단 체제에서 이념이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나라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를 따져 묻는 것은 '색깔론'이 아니다."

―젊은 날 학습·실천하면서 형성된 이념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본인은 완전히 전향한 것인가?

"1990년대 초 동구권 붕괴를 보면서 회의가 시작됐다. 1년 3개월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와 제러미 리프킨 같은 미래학자의 책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출감 뒤 1994년 봄 중국을 현장 방문하고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다. 하지만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이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린 시점으로부터 10년 뒤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SK그룹에서 일했던 것이 결정적 도움이 됐다."

―2000년 9월~2002년 1월까지 SK텔레콤 북한담당 상무를 했는데?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있은 뒤 SK는 대북 사업 인력을 찾았고 내가 추천됐다. 북한 사업의 리스크 관리를 해주는 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점 청와대 국장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나는 기업을 선택했다. 감옥에서 봤던 책에서 '21세기 선진 조직은 기업 조직'이라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SK 임원으로서 평양에 세 차례 방문했다고 들었다. 대학 시절 '김일성주의'를 신봉한 주사파 리더였는데, 북한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나?

"북측에서는 나와 관련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노동당 고위 간부가 '국방위원장님(김정일)이 보고 싶어 한다'며 면담을 제안했다. 김정일이 SK의 대북 사업 건으로 직접 나를 만나겠다고 했을 리는 없었다. 대남 지하당(地下黨) 사업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라는 걸 직감했다. 내가 '논의할 사안이 없다'며 거절하자 언쟁이 붙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원 북한담당기획관으로 일했는데?

"남재준 국정원장이 함께 일하자며 나를 불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북한은 3차 핵실험(2013년 2월)을 감행했다. 미국이 사드 배치를 처음 요구한 것은 이때였다. 그 뒤 언론에서 냄새를 맡자, 우리 정부는 '미국에서 사드 배치를 요청한 적도 없고 협의한 적도 없다'며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다. 정권 후반기까지 끌고 가다가 결국 수도권 방어를 못 하는 성주에 배치하고 말았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논란 속에서 중국의 '전승 70주년 열병식'에도 참석했다. 중국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에 이미 '화웨이' 이슈도 시작됐다. 미국에서 '핵심 정보 유출이 우려되니 화웨이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말라'는 요청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직접 우리에게 사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근혜 정부 전반기는 '친중(親中)'에 기울었다."

―당신은 국정원에서 어떤 입장이었나?

"나는 '신(新)냉전 시대에서 중국으로 기우는 정책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남재준 원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얼마간 갈등이 있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할 파트너가 필요한데, 이런 우리를 '동맹'으로 여기겠나. 조 바이든 부통령이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안 좋다'고 말했던 것이다."

―국정원 근무 1년 만에 나왔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2013년 12월 장성택이 숙청된 뒤 북한 정세 판단에서 이견을 빚었다. 남 원장은 김정은 체제가 흔들릴 것으로 보고 정권 붕괴 공작으로 갔다. 나는 '친중파 장성택의 숙청 뒤로 김정은 체제는 오히려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 원장은 열정과 애국심이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정세 분석은 우리의 희망대로 해서는 안 된다." ―박근혜 정부에서 김정은 체제 붕괴 공작이 계속 진행됐나? "국정원을 나온 뒤 남 원장 측과 통화하니 '공작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실제 그런 게 아니라 밑에서 그런 보고서를 올리는 것뿐'이라고 말해줬다. 공작을 하더라도 먼저 정확하게 알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정원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에 오염된 것이다. 햇볕정책 정권이 들어오면 거기에 맞는 보고서를 생산하고, 보수 정권에서는 또 대통령이나 국정원장의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만들어준다." ―얼마 전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에 와서 사드 문제를 또 언급했고 미국을 비판했는데? "왕이 외교부장이 사드를 또 꺼낸 것은 교활한 노림수다. 사드를 쳐서 한국에서 미 중거리미사일 배치 이슈가 아예 못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방한한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

―미국이 우리나라에 중거리미사일 배치를 요청해와도, 문재인 정권의 성격상 이를 받아들일 리 있겠나?

"문 정권은 외교·안보에서 '난파선'처럼 됐다. 하지만 보수 지도자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사드나 중거리미사일 배치, 주한 미군 주둔 비용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분명한 입장과 전략을 밝힌 적 없다. 이런 고민 자체가 없는 것이다. 몇 달 전 황교안 대표가 내놓은 '민평론(국민중심평화론)'은 아무 내용 없고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우리에게는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경제 보복 조치 악몽(惡夢)이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 쪽에 확실하게 섰을 때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일본 아베노믹스의 성공 배경에는 미국이 '엔저(低)'를 인정해준 데 있다. 대중국 무역 의존도를 낮추고 인도나 동남아로 돌렸어야 했다. 중국의 협박과 회유에서 벗어나는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의 살길이다."

―중국은 북한을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아닌가?

"중국이 북한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중국은 그동안 '친중파 정권'을 위해 공작해왔지만, 김정은이 들어서자 친중파인 장성택 일당이 숙청됐다. 2017년 9월 시진핑이 베이징에서 '브릭스 정상회의'를 개막한 날에 6차 핵실험을 해 잔칫상을 엎어놓았다. 자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전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내가 취재한 바로는,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에 가장 반대하는 나라는 사실 중국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턱밑에 핵과 미사일이 놓이기 때문이다. 북·중은 혈맹이라고 하지만 서로 경계하는 관계다. 2009년 2차 핵실험을 할 때 북한은 두 시간 전에 미국에 알렸지만 중국에는 20분 전에 통보했다."

―김정은이 '중국 견제 메시지'로 트럼프를 정상회담으로 끌어냈다는 관측이 있었다.

"우리가 중국을 대신 견제해줄 수 있으니 그런 내용으로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미국과 싸웠던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의 '친미비중(親美非中)' 전략을 본떴다."

―지금은 다시 미·북 관계가 '화염과 분노'로 돌아가고 있는데.

“지금은 6·25 이후 최악의 위기다. ‘신(新)냉전 시대’라는 정세 인식이 있어야 한다. 2003년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놓았을 때 이미 중국식 패권주의가 시작됐다. 북한은 4차 핵실험이 있은 2016년 ‘7차 당 대회’에서 북한 주도 통일을 천명했다. 북한의 핵무장으로 체제 경쟁에서 우리는 역전패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평화’ ‘탈냉전’ ‘운전자론’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