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왕국' 인도, 성폭행범 처벌 패스트트랙 제도 첫 도입

장지영 기자 2019. 12. 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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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라프라데시주, 특별법원 등을 통해 21일 만에 사형까지 선고 가능
인도 캘커타에서 지난 9일 여성들이 성폭행범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지난달 말 성폭행당한 여성 수의사가 법원에 증언하러 가다가 피의자들에게 불타죽는 사건이 발생한 뒤 인도에서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EPA연합뉴스

지난 2012년 12월 16일. 인도 뉴델리 남부 외곽인 무니르카에서 영화를 보고 귀가하던 인턴 물리치료사 죠티 싱은 남자친구 아빈드라 판데이와 함께 밤 9시 30분쯤 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개인이 운행하는 전세버스였다. 버스에는 두 연인 외에 운전사 포함 6명의 젊은 남성이 탄 상태였다.

버스가 지정된 노선을 벗어나자 아빈드라는 운전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다른 남성들이 쇠뭉동이로 무차별 구타하면서 의식불명에 빠졌다. 이후 6명의 남성들은 죠티를 구타하고 윤간한 뒤 아빈드라와 함께 도로에 내던졌다. 죠티와 아빈드라는 그 날 밤 11시쯤 행인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빈드라는 다음날 깨어났지만 질과 내장이 파열된 죠티는 사경을 헤매다 2주만에 사망했다.

인도 언론은 전통적으로 강간당한 여성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죠티는 ‘무서움을 모르는’이라는 뜻의 ‘니르바야’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죠티가 윤간 당하는 중에도 범인들을 물어뜯어 확실한 증거를 남겼기 때문이다. 다만 죠티의 부모는 얼마 뒤 “딸의 용기가 세상에 알려지길 바란다”며 이름을 공개했다.

지난 2015년 영국 BBC가 죠티 싱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인도의 딸'에 나온 범인 무케시 싱. 그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인도 정부는 당시 이 다큐멘터리의 인도 내 방영을 금지했다가 국제 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인도의 딸' 캡처.

죠티 사건의 잔혹함이 보도되면서 인도 전역에서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그동안 인도에서는 성범죄가 끊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탓으로 치부하거나 아예 공개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죠티를 윤간한 6명의 남성들과 그 변호인 역시 “품위 있는 여성은 밤 9시에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았으면 폭행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의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는 성폭행 신고가 적을 뿐만 아니라 신고해도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실제 기소되어 처벌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가해자가 유력 인사인 경우엔 더더욱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죠티 사건은 인도의 고질적인 강간 문화와 여성차별 문제를 각성시키고 새로운 입법으로 이어지는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인도 정부는 국제적 질타가 이어지자 비로소 대책 마련에 나섰다. 2013년 성범죄 처벌 강화 법안에 이어 경찰서에 성폭력을 담당하는 여성 경찰관이 배치되는 등의 후속조치가 마련됐다. 하지만 16일로 죠티 사건이 발생한지 7년이 됐지만 여전히 인도에서 신고되는 성폭행만 하루 100건에 달하며, 이 가운데 처벌되는 것은 4건에 그친다. 성범죄 형량 강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여성이 강간을 당한 뒤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있다. 최근엔 증언하러 법원에 가던 성폭행 피해자가 피의자들로부터 불태워져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죠티 사건의 경우 가해자 6명은 모두 검거됐지만 버스 기사는 재판 중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범행 당시 17살이었던 1명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소년법이 적용돼 소년원에서 3년간 복역 뒤 2015년 말 석방됐다. 나머지 4명은 1·2심 모두 사형이 선고됐지만, 재판과정에서 방어권이 무시됐다고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특히나 이들 4명 중 1명은 최근 대법원에 제출한 청원서에서 “뉴델리의 공기는 가스실 같고 물도 독으로 가득하다”며 “어차피 수명이 줄어들고 있는데 사형 집행이 왜 필요한가”라는 황당한 주장을 펼쳐 공분을 샀다.

지난 2015년 BBC의 다큐멘터리 '인도의 딸'이 공개된 이후 인도 여성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다큐멘터리에서 뻔뻔하게 피해자의 행동을 문제삼은 피의자 무케시 싱을 당장 사형시키라고 요구했다. EPA연합뉴스

전 세계적으로 ‘강간 국가’라는 악명을 얻은 인도에서 지난 14일 강간범 처벌 패스트트랙 제도가 도입됐다. 타임스오브인디아 등 현지 매체는 인도 남부 안드라프라데시 주의회가 전날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강력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특별법원 등을 통해 21일 만에 사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건 조사와 1심 재판 절차에 배정된 기간은 각각 7일과 14일이다. 강간 사건이 처리되는데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기도 하는 인도의 재판 현실을 고려하면 획기적인 제도인 셈이다. 아울러 안드라프라데시주는 성범죄 관련 형량도 현지 주 정부로는 처음으로 최대 사형으로 강화했다.

지난해 인도 정부는 성폭행 사건들을 패스트트랙으로 전담할 특별 법원 1000곳을 개설하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최근 성폭력 근절을 요구하는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가해자들에게도 피해자들처럼 린치를 가하고 불태우라는 등 격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6일 여성 수의사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죄자 4명이 현장검증 도중 주민들의 거센 분노에 직면하자 도망치다 경찰에게 사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인권단체들은 “초법적인 사형”이라며 비판했지만 대중은 “정의의 실현”이라며 환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안프라프라데시 주의회의 강간범 처벌 패스트트랙 제도 도입이 성난 인심을 달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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