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선배의장도 말린 총리직, 정세균 수락한 까닭

강찬호 2019. 12. 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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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 전화 걸어 "안된다" 충고
정, 청와대 읍소 절실해 수락한 듯
삼권분립 훼손, 결국 대통령 책임
강찬호 논설위원
“국회의장은 대통령 버금가는 자리이고 삼권분립의 상징입니다. 그 중요한 사람이 대통령 밑에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같이 의장을 했던 사람으로 하는 얘기인데 그런 일은 안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지난 11일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정세균 전 국회의장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19대 국회 후반기 의장이었던 정의화는 자신의 뒤를 이어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을 한 정세균이 총리에 지명될 것 같다는 뉴스를 듣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걸어 말린 것이다. 정세균은 “고사하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그래서 정의화는 “다행입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국회의장직에 대한 정의화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새누리당 출신으로 의장이 된 그는 친정인 여당과 청와대로부터 국회선진화법·노동개혁법 등을 직권상정하라는 압박에 시달렸지만 “법적 요건이 안된다”며 합의 처리를 고수해 의장의 권위를 지켜냈다. 이런 그였기에 정세균에 손수 전화 걸어 하기 힘든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사 중”이라 했던 정세균은 엿새 만에 입장을 뒤집어 총리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필자가 전화를 돌린 복수의 전직 국회의장들은 하나같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삼권분립과는 거꾸로 가고있다.” “지난해까지 국회의장석에 앉아 총리에게 인사받던 사람이 총리로 내려가 후배 의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후배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이 TV로 나온다면 민망한 일 아니겠나.”

정세균은 올 초부터 총리지명설이 떠돌았다. 청와대를 떠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세균의 지역구인 종로에 출마하려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정세균 총리’설은 증폭됐다. 그때마다 정세균은 “전직 국회의장 체면이 있지…내가 총리가 되려 하면 의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랬던 그가 “삼권분립 훼손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피한 채 “경제가 활력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만 남긴 채 총리 인사청문회 준비에 들어갔으니 의문이 커질 수 밖에 없다.

필자는 과거 민주당 출입 시절 당 대표였던 정세균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인연이 있다. 진영논리에 눈먼 의원들이 넘치는 민주당에서 정세균은 현실 감각과 중용의 도를 갖춘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총리가 되면 기대할만한 일들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탈핵’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현 정부의 이념·코드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인물이어서다. 정세균의 원자력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노무현 정부 산업자원부 장관 시절 정세균은 경주 신월성 원자로 2기를 착공했다. “우리나라 전기가 값싸고 품질 좋은 건 원자력의 기여가 크다”며 이용 확대를 공언하기도 했다.

지난 여름 김승환 전북도 교육감이 전주 상산고의 자율형사립고 지정 취소를 추진하자 전북 지역 의원 전원을 불러 모아 “그러면 안 된다고 김 교육감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독려한 것도 정세균이다. ‘무진장(무주·진안·장수)’에서 내리 4선을 해 전북의 ‘맹주’가 된 정세균은 2010년 교육감 선거에 출마해 힘겨운 5파전을 벌이던 김승환을 지원해 당선에 큰 힘을 보태줬다. 그런데도 김승환이 자사고 지정 취소란 무리수를 두자 주저 없이 빨간 불을 켠 것이다. “김승환 그 사람, 너무 ‘극진보’더라. 난 중도진보인데…”라는 정세균의 말에서 그의 이념 지형이 읽힌다. 그 자신도 차기 정권의 핵심 과제는 ‘통합과 경제’라고 강조하고 다닌다. 정답 아닌가. 총리감으로 적격인데 국회의장 경력이 ‘족쇄’가 되고 있다.

정세균도 삼권분립과 국회의장의 권위에 대한 존중심이 왜 없겠는가. 그런 그가 총리직을 수락한 건 청와대의 ‘읍소’가 너무 절실했기 때문이란 얘기가 있다. 민주당 소식통 전언이다. “청와대가 정세균에게 ‘정말 사람이 없다. 김진표는 지지층 90%가 반대하니 도저히 안 된다. 우리 사정이 너무 어렵다. 눈 딱 감고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마음 약한 정세균이 안 받아들일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믿고싶다. 그래도 청와대의 잘못은 용서받기 어렵다. 얼마나 국정을 당파적으로 운영했으면 총리감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 지난해까지 국회의장 한 사람을 보쌈하듯 데려오는 무리수를 두는가. 그러려면 적어도 문 대통령은 그제 총리 후보 지명 발표에 앞서 국민 앞에 양해를 구하고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은 “입법부 수장 지내신 분을 총리로 모시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는 한줄짜리 회피성 문구가 전부였다. 이러니 “국민과의 소통에서 전임 대통령과 다른 게 뭐 있나”는 탄식이 넘쳐나는 것 아니겠는가.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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