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女行), 떠나보셨나요?

장회정 기자 2019. 12. 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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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자들이 여행을 한다. 혼자 가기는 싫지만 여행사 패키지 상품은 끌리지 않는 여자, 친구랑 가려니 일정이 안 맞아서 못 가는 여자. 여행의 즐거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여자, 아이 다 키워놓고 비로소 여행 갈 여유가 생긴 여자, 하지만 가족과는 가기 싫은 여자들이 ‘함께’ 여행을 한다.

여행여락(女行女樂, https://blog.naver.com/localtravel)은 운영자이자 인솔자이고, 기획자이자 동행인 허나윤 대표가 2016년 8월 지리산 여행을 시작으로 문을 연 여자들의 여행커뮤니티다. 지난 3년간 적게는 4~5명, 많게는 20명이 팀을 이뤄 각지를 누볐다.

여자끼리 떠나는 여행은 다양한 콘셉트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 5월 초 3쌍의 모녀와 다녀온 베트남 여행. 엄마들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무이네 사막에서 애쓰는 딸들의 분투를 담은 이 사진에 여행 멤버들은 ‘모녀여행의 진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행여락 제공

가고 싶은 데 혼자 가기 불편한 곳부터 음식·음악·요가 등 원포인트 테마까지…2060 여자들이 함께 계획하고 정보 찾고 만들어 가는 여행

여행여락은 ‘여행’에 기대하는 참가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행지마다 특별한 포인트를 담아낸다. 통영여행은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공연 관람과 트레킹, 제철 음식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일랜드는 전통음악축제 시즌에 떠나는 음악여행으로 꾸렸다. 인도 요가여행은 현지에서 살다시피 하는 요가전문가를 초빙해 명상 투어로 꾸몄다. ‘배낭여행 1세대’로 공정여행을 하는 사회적기업에서 일했던 허 대표는 자신이 다녀온 좋은 곳 그리고 여자 혼자 가기에는 불편한 지역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이를테면 셰르파나 가이드가 대부분 남자인 히말라야 트레킹이라거나, 초행자는 헤매기 쉬운 쿠바 같은 곳 말이다.

대자연과 음악으로 충만했던 아일랜드 음악여행(2018). 여행여락 제공

“여자끼리 다니니까 참 좋다”는 회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소감이자, 여행여락의 정체성을 함축한 말이다. ‘적어도 여기서는 이상한 사람을 만나 이상한 말은 듣지 않겠구나’ 하는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고 나아가 나이를 넘어 친구가 되기도 한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여행여락의 멤버는 110여명 남짓.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잘 맞는 여자들이 모여 여행 다니면 좋겠다’는 허 대표의 담백한 의도에서 출발한 여행여락은 마치 생물처럼 캐릭터를 잡아갔다.

여행의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회원들의 동기는 2권의 매거진 출간 작업으로 이어졌다. 보다 밀도 있는 커뮤니티로 성장하는 데에 우리 사회에 도사린 여성 혐오와 안전에 대한 이슈도 한몫했다.

‘혼자 여행 다니는 여자’ 혐오·차별적 시선으로부터 해방…가족 아니어도 모두가 편안한 친구돼 그때그때 느끼는 것 나누는 즐거움 알게 돼

■ 왜 여행하는 여자를 싫어할까

주말 저녁 홈쇼핑 채널은 일제히 여행상품을 팔고, 여행 가서 먹고, 게임하고, 음식도 만들어 파는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민족 대이동의 대명사 명절은 여행 가기 좋은 연휴의 다른 말이다. 젊어서 여행 많이 다니라는 말은 덕담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은 여행지상주의 사회처럼 변했는데 여성은 소비자로서의 욕구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어요. 여행하는 여자들이 늘어날수록 여성 여행자에 대한 혐오는 더욱 극심해지고 있죠.” 허 대표는 ‘여행하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포럼을 열고 ‘여행하는 여자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여행여락 매거진’ 특집 기사를 제작했다. 2015년부터 인터넷 매체에 여행기를 연재한 정효정 작가는 자신의 글에 붙은 500여개의 악성 댓글을 토대로 ‘혼자 여행하는 여성을 싫어하는 남성 연구보고서’를 써서 보탰다. 남성 악플러의 유형을 ‘전통적 여성관 고수형’ ‘여자(딸, 동생, 아내) 걱정해형’ ‘인도 혐오해(괴담유포형)형’ ‘한비야 책임론형’ ‘나라 탓하지 마라형’ 등으로 분류한 정 작가는 “남성들이 여자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모험과 여행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홍성 모녀여행(2017). 여행여락 제공

“전통적인 가부장제가 여성의 이동을 제한한 것과 같은 논리예요. 여성이 이동을 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관리하지 못한다는 인식인 거죠. 그다음 이유는 여행 자체가 정보, 경험, 자산이 되는 사회가 됐다는 점입니다. 자기 돈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여성들에게 갖는 이상한 박탈감이랄까요.”

2017년 여성 출국자 수는 남성 출국자 수를 넘어섰다. 여행의 주 소비층임에도 여행 가는 여자는 마치 출입국 절차마냥 “남편 허락받고 가느냐” “식구들 밥은 어떻게 하느냐” “무슨 돈으로 여행 다니냐”는 질문을 감내해야 한다.

허 대표의 고민은 여성이 다수인 여행업계 종사자에게도 가닿았다. 여성 인솔자는 성적 희롱이나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다. “여행은 철저히 서비스업종이라 생각한다”는 허 대표는 자신의 감정적·육체적 노동을 누구에게 쏟을 것인가를 선택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대상이 여성이라는 데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참가자의 안전을 책임지고 모든 일정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할 이유도 생겼다.

여성·장소에 관심 갖고 각지 누빈지 3년, 오키나와 위안부 흔적·기지촌 수용소 몽키하우스 등 ‘페미니즘 아카이빙 프로젝트’로 귀결되기도

■필연처럼…페미니즘 아카이빙 여행

“여자가 하는 비즈니스는 최대한 민첩하고 순발력 있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전문성이나 장점은 최대한 드러내자는 전략이었죠.”

페미니즘 아카이빙 여행의 일환으로 방문한 동두천의 성매매 여성수용소 ‘몽키하우스’의 잔해(2018). 여행여락 제공

여성학 전공자로 반성매매 활동을 오래 해온 허 대표를 가이드 삼아 페미니스트 아카이빙 여행이 시작됐다. 여행이란 당연히 장소에 관심을 갖게 되는 행위이니 자연스럽게 여성의 관심사가 여행의 목적지로 연결됐다. 도카시키섬 7인의 조선인 위안부 중 한 명인 배봉기 할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오키나와, 일제강점기 유곽으로 시작해 미군 위안소를 거쳐 60년째 성매매 집결지로 명맥을 이어온 전주 선미촌,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고 애국교육을 실시했던 수용소 ‘몽키하우스’, 일제에 의해 호남 최대의 유곽지역이 조성됐던 군산 등이 그 무대가 됐다. 선미촌을 비롯해 대구의 자갈마당 등 전통의 성매매 ‘명소’는 대부분 도시재생구역에 편입되거나, 재개발로 이미 사라졌다. 허 대표는 새 건물을 지어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라고 말끔한 얼굴로 바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장소가 갖는 역사성을 기억하고 기록하자는 마음이 모여 아카이빙 여행의 여정은 지속됐다. “지은 죄가 없는데도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따끔거렸다”는 한 참가자는 오키나와를 다녀온 뒤 “착취의 기억을 공유하는 여성의 연대감”을 느꼈다는 후기를 남겼다. 그 뜨거운 무언가가 기록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게 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로도 확장됐다. 무악동, 성미산마을, 합정동 등 서울의 기억을 담은 <여자들의 도시 아카이브북>은 12월 중순 텀블벅 펀딩 목표 금액을 초과 달성하고 출간을 앞두고 있다.

■ 함께 만드는 여행

‘좋은 건 나만 알고 싶은 마음’과 ‘좋은 건 나누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가운데 여행여락에 대한 회원들의 애정 어린 조언도 쏟아지고 있다. 허 대표는 규모를 키우기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에 무게를 두고 있다. 2020년에는 여성 여행자 스스로 자신의 관심사가 반영된 여행을 만들고 참여했으면 하는 마음에 ‘트래블리더’ 모집 공고를 냈고 1차 모임을 마친 상태다. 그림책 모임 활동가, 박물관 큐레이터, 시민단체 및 마을공동체 활동가 등 회원들 개개인의 ‘이력’이 풍성한 여행을 기대하게 한다. 예술이나 역사 외에도 여성들이 소외되기 쉬운 액티비티 관련 여행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흔적을 찾아 떠난 일본 오키나와 도카시키섬(2018). 여행여락 제공

“참가자가 페미니스트라고 꼭 인증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은 분명히 페미니즘 관련된 이슈이고 페미니스트가 진행하는 여행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명확하게 밝히고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허 대표는 “너무 가고 싶은데, 애들 시험이 있으니 내년에나…”라고 망설이는 여성에게 “내년은 없어요”라며 여행을 권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여행을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여행에 과도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여행 다니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 한국에서 여행, 대체 뭘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든 비슷한 게 많아요. 우리가 전혀 몰랐던 신세계가 있진 않거든요. 여행 한 번 다녀왔다고 인생이 바뀌지도 않고요. 본인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주 여행을 가는 게 훨씬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느끼는 기쁨을 함께 간 사람들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허 대표는 ‘여행여락 매거진’ 2호의 서문에 “여성 혐오사회에서 여행하는 여자는 어차피 나쁜 여자일 수밖에 없다”며 “함께 나쁜 여자가 될 여성들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썼다. “나쁜 여자들이 더 많이 돌아다닐수록 이 세상은 여성에게 좀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장회정 기자 long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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