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세, 74세, 59세.. 이태원 그녀들의 곡절 많은 삶, 흔적
[오마이뉴스 윤일희 기자]
내가 살고 있는 곳 인근에 위치한 파주시는 대규모 기지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당시 8개 면이 기지촌이었는데, 이는 파주시 거의 대부분이 기지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곳으로 외출하는 미군이 하루 1만 1500여명이었다고 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터다.
기지촌 미군 '위안부'가 매개하는 돈의 경제는 실로 대단했다. 기지촌 원주민들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파주가 얼마나 호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햄버거, 콜라가 뭔지도 모를 시절, 이들은 이미 이런 음식들에 익숙했다. 60년 대 시골 농촌이라고 믿을 수 없는 건축이 이루어졌고,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이 주를 이루었다.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당시 주민 대부분 미군 '위안부'들의 덕을 보았던 셈이었다. 국가는 달러의 화수분인 이들을 '애국자'라 어르며 달러를 벌어들이게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달러벌이로 쓸모가 없어지자 철저히 버려졌다.
▲ 다큐멘터리 <이태원> 스틸컷 |
ⓒ KT&G 상상마당 |
삼숙, 나키, 영화
77세라고 믿기 어려운 노익장을 과시하는 삼숙. 40년간 이태원에서 미군을 상대로 바를 운영해왔다. 미군이 빠져나간 바는 40년이라는 시간만큼 쇠락했다. 걸걸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꿀릴 게 없이 살았음을 증명한다. "늙은 양갈보도 있네"라는 조롱에도 끄떡없다. "왜냐, 나는 아니니까."
이 말은 미군 기지촌 내부의 차이를 확연히 드러낸다. 미군 상대로 술은 팔았지만, 몸을 팔지는 않았다는 뜨거운 자부심은 그의 삶을 단단히 지켜왔으리라. 하지만 이 긍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야했던 '위안부'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있는 차별의 언어이기도 하다.
50,60년대 가부장의 나라에 딸을 귀이 여기는 아버지란, 그 시절 지어 먹던 밥에서 쌀알을 찾아내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삼숙의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다. 연일 이어지는 배고픔과 아버지의 매타작은 그녀를 집에서 탈출하게 했다. 그렇게 흘러 들어간 곳이 파주 기지촌이었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인생도 있는 법. 잡화상을 하던 삼숙은 이태원으로 점포를 얻어 나오며 파주를 떠났다.
"미국 사람들은 새 거 좋아 안 해. 역사적인 거 좋아하지."
옛것을 싹 밀어내고 새것만 더 높이 지으려는 '뉴 타운' 개발을 고까워하지만, 이 호재는 그에게 50억의 거금을 안겨주었다. 호텔을 경영하고 싶다는 그의 오랜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 다큐멘터리 <이태원> 스틸컷 |
ⓒ KT&G 상상마당 |
살맛 하나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연신 담배를 펴대는 59세의 영화. 팍팍한 삶이 여실히 묻어난다. 자기 한 몸도 건사하기 어려울 텐데, 동생의 딸을 키우고 있다. 자식을 맡겨만 놓고 생활비를 대지 않아 사는 게 더 팍팍하다. 무뚝뚝하지만 풀죽어 보이는 조카를 보듬는 영화의 품엔 사랑이 묻어난다. 초등생 조카 학교 운동회에 먹을 것을 싸가지고 쫓아간 영화가, 휴식시간에 조카와 덩그러니 앉아 먹는 점심은, 북적이는 축제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입성하는 것이 대부분 미군 '위안부'의 꿈이었다. "죽으나 사나 미국은 갔다 온다"고 다짐한 영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떠났지만, 그곳은 꿈의 나라가 아니었다. 사랑을 약속했을 남편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고, 그런 여자라는 소문을 견디는 일은 잔혹했을 것이다. 결국 돌아왔다. 무람없이 그를 받아주는 유일한 이곳 이태원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살았겠지만 점차 병들고 늙어 가는 몸은 노동 시장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빈곤은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 야수만큼 무섭다. 게다 몰아치는 개발의 광풍은 그가 살고 있는 방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미군 남편과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떠났던 '위안부'들이 모두 불행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평탄하게 산 것만도 아니다. 타국에서 의지가지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그리 녹록한 일이겠는가. 60, 70 년대 미국으로 입성한 한국 여성들에 대한 낙인(그렇고 그런 여자라는)은 이들의 삶을 더 힘들게 했다. 태어난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일도, 어울릴 이웃을 만드는 일도, 마땅한 일자리를 잡는 일도, 모두 쉽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와 조롱을 퍼붓는 사람에서부터 은근히 따돌리는 무리까지, 게다 같은 취급을 받을까 두려워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는 동족의 거부를 감내하는 일은 참혹했다.
남편은 모른 체했고 커가는 자식들은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조국의 그리운 음식은 환영받지 못했고 먹을 수 없었다. 조국의 언어는 배제되었고 잊어야 했다. 부푼 꿈을 안고 '탈조선'한 여성들이 겪은 삶의 고초나, '코리아 드림'을 안고 탈국한 이주민 여성이 한국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고난의 형상이나, 어찌 이리도 닮은꼴일까(<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참고)
▲ 다큐멘터리 <이태원> 스틸컷 |
ⓒ KT&G 상상마당 |
<이태원>을 보고난 후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삼숙이 이룬 부는 분명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렇다고 삼숙의 부를 인정하는 일이, 나키와 영화의 가난을 비난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버는 것만큼 빚이 더 늘어나는 기지촌의 착취 경제 시스템은 미군 '위안부'의 돈을 고이게 하지 않았다.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고이지 않고 새는 물처럼 늘, 가족과 타인의 기름진 뱃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삼숙은 내가 본 가장 부자인 기지촌 여성이다. 부자인 기지촌 여성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노오력'한다고 해서 50억을 거머쥘 수는 없지 않은가. 부동산이 신묘에 가까운 조화를 부려야 누릴 수 있는 한국의 비정상적 축재(蓄財)를, 왜 당신은 못했느냐고 질타해서는 안 된다.
미군 '위안부'를 다룬 다큐멘터리 <전쟁과 여성> 중, 평택 '위안부' 쉼터를 찾은 한 방문객이 남긴 말이 오래도록 맘에 머물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았더라면, 우리는 이들과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역사와 후대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가장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하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마땅히 국가여야 하지 않은가? 2014년 6월 25일 기지촌 여성 122명은 기지촌 단체, 기지촌 관련 연구자, 학자, 변호사들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2017년 1월 20일 낙검자 수용소 등에 격리 수용하여 치료한 행위의 위법성과 (1심 판결), 2018년 2월 8일 국가의 성매매 정당화와 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에 대한 국가의 위법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받았다. (2심 판결) 미군위안부들의 인권 침해에 대해 국가가 묵인 방조한 책임을 인정했다면, 피해자에 대한 지원에 조속히 나서야 한다.
가난과 노쇠와 병약이 짙게 드리우고 있는 미군 '위안부'의 몸은 오늘 하루를 지나기가 힘겹다. 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에 대해 정부, 국회, 사법부는 더 이상 그 책임을 미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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