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 잿더미 된 장애인들 일터에 5억원의 기적이 찾아왔죠

강화=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19. 12. 2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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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특별 인터뷰 김성수 주교]
발달장애인 시설 '우리마을' 촌장
시민단체·소방관부터 아이들까지 대기업 기부 없이도 거액 모여
지금은 '우리'를 회복해야할 때.. 이 기적 통해 마음과 사랑 봤죠

"이건 기적입니다. 대한민국, 좋은 나라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지난주 인천 강화 발달장애인 시설 '우리마을'에서 만난 '촌장(村長)' 김성수(89) 성공회 주교는 이미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기적은 지난 10월 초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장애인 20명의 일터인 콩나물공장이 전소(全燒)한 이후 상황을 말한다. 하루 2t, 연 매출 18억원 규모로 성장해 장애인들에게 월 90만~130만원씩 소득을 올려주던 일터는 10월 7일 새벽 5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구순의 김성수 주교는 "나와 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가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우리' 아닌가요"라고 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발달장애인들이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품. /박상훈 기자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건 그 직후부터다. 콩나물을 납품받던 아이쿱생협 등이 나서서 1억여원의 성금을 모아줬고, 강화의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바자를 열고, 소방관들도 1000만원을 모았다. 장애인들이 월급을 내놓기도 했고, 아이들은 저금통을 가져왔다. 교단이 다른 여의도순복음교회(이영훈 담임목사)도 5000만원을 지원했다. 대기업의 거액 기부 없이 2개월여 만에 5억원이 모였다. 철거 비용 7000만원은 인천시가 지원했다. "보통 장애인시설 반대하잖아요? 이번 일 겪으며 '그래도 우리 마을이 밉보이지는 않았구나' 했지요. 고맙고,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다."

콩나물을 납품받던 풀무원은 공장을 다시 지을 때까지의 일감으로 버섯 가공을 맡겨줬다. 장애인들은 소형 크리스마스트리 등 장식품을 만들어 인근 카페에서 팔았다. 김 주교는 이 기적을 통해 돈이 아니라 마음과 사랑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마을'이 탄생한 것은 김 주교의 헌신이 있어서 가능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1970년대부터 장애인학교인 베드로학교를 운영했다. 다른 장애인들은 의사표현은 할 수 있는데, 발달장애인들은 그것도 힘들었다. 학생들은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학교 떠나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주교는 2000년 은퇴하면서 유산으로 받은 고향 강화 땅 3000평을 내놓고 '우리마을'을 만들었다. 장애인에겐 일이 복지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사택도 여기에 짓고 '촌장'을 자처하며 울타리이자 친구로 함께 살아왔다. 콩나물 공장 20명 외에도 전기 부품을 조립하는 30명 등 우리마을에선 부설 주간보호센터와 거주시설까지 90여명의 발달장애인이 함께 생활한다.

불탄 콩나물 공장을 철거하니 김 주교 부모님 묘소가 보였다. 공장이 앞을 가리던 김 주교 사택도 오랜만에 전망이 탁 트였다. 내년 가을 다시 공장을 지으면 사택 전망은 가려지고, 묘소도 잘 안 보이게 된다. 김 주교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내가 할 것 다 해놓고 남는 걸 남에게 주면, 주는 게 아니지. 내가 아까운 걸 줘야 진짜지." 그는 최근 받은 우당상을 비롯해 만해대상, 민세상 등 상금도 받는 족족 우리마을에 내놓았다. 그래서 상 받는 걸 좋아한다.

김 주교는 스스로 '바보'라고 했다.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다. 의사들이 '하루 1만보'를 권해서 계속 1만보를 채웠더니 어느 날부터 무릎이 따끔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이까짓 것' 하면서 계속 걸었더니 무릎 연골이 상해 걸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김 주교의 이런 뚝심 덕에 우리마을의 장애인 '친구'들은 일과 꿈을 얻고 있다.

화재가 나기 전 김 주교의 꿈은 '발달장애인 요양원' 건립이었다. 발달장애인들은 40대면 이미 노화 현상이 시작되는데 이들을 위한 요양원은 없기 때문. 세상에서는 '다 같은 노인인데 같은 요양원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젊은 시절에도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한 발달장애인들에겐 일반 요양원은 또 다른 벽이다. 그는 "이 친구들 살아 있는 동안에 최고로 대접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90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가 많다고 했다. "가짜 교인이었고, 부모님에게 효도도 못 했고, 세상 변화시키겠다는 '헛된 꿈' 꾸고…. 돌아보면 나부터 변화해야 했어요."

수년 전부터 기도 제목이 '우리의 회복'이다. "주기도문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라고는 안 하잖아요. 나라 걱정도 많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다 틀리다는 건데, 정권이 몇 번 바뀌어 봐도 똑같잖아요? 어려워도 아니 어려울수록 '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근데, 이런 기도 드리면 하느님이 뭐라 하시는 줄 알아요? '자식아, 너나 잘해' 그러셔요. 하하!"

1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제야 김 주교가 예수님과 성경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말이 아닌 삶으로 예수를 닮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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