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시선] '서민은 몰라도 된다'는 정부

이상언 2019. 12. 2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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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재력 원천은 정보력
검찰 공보 통제는 소시민 귀막이
빈부 격차에 정보 격차까지 더해
이상언 논설위원
밀리언셀러 『화폐전쟁』의 첫 장(章)에 저자 쑹훙빙은 이렇게 썼다.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 헨리 퍼시가 런던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군이 여덟 시간의 고전 끝에 무려 3분의 1의 병력을 잃고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중략) 이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시간은 네이선의 정보보다 무려 하루나 늦은 후였다. 그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나 되는 차익을 챙겼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전쟁으로 얻은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부호가 된 계기를 1815년의 워털루 전쟁으로 기술하는 이는 쑹훙빙 말고도 많다. 로스차일드 집안의 셋째 아들 네이선이 영국이 프랑스에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영국 정부보다도 30시간 정도 먼저 입수한 뒤 영국 국채를 사고팔아 떼돈을 벌었고, 그 자금이 힘을 발휘해 그의 형제들이 유럽 금융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게 널리 알려진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학자(경제사 전문가인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대표적)도 있지만, 그들도 로스차일드 가문의 융성에 ‘정보력’이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작가 데릭 윌슨 등에 따르면 네이선과 그의 형제들은 유럽 곳곳에 정보원을 뒀다. 이들은 암호문을 매단 비둘기를 메신저로 쓰기도 했다. 인편으로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정보를 보낼 때는 가장 빠른 배를 사용했다. 공식 발표나 신문 보도보다 빠른 소식은 이 가문이 무역과 투자로 부를 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섯 형제가 런던·파리·프랑크푸르트·빈·나폴리에 각기 거주하며 부지런히 정보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남긴 편지로 알 수 있다.

정보가 돈이고, 힘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모든 일의 속도가 빨라진 지금엔 더욱 그렇다. 단 몇 초가 운명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초를 쪼갠 찰나가 승패를 가른다.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의 책 『우리의 미래』에는 뉴욕과 시카고의 증권 회사들이 거액을 내고 광케이블 통신망을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 통신보다 0.003초 빠르다는 내용이 있다. 0.003초 차이로 누군가는 매수에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사람들이 ‘운이 없었다’며 스스로 위로한 많은 일이 사실은 정보력 때문에 빚어질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큰 기업들은 비싼 값을 치르며 정보를 수집한다. ‘지라시’라는 정보지가 온갖 욕을 먹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중요한 정보 생산지다. 검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검찰이 신약(新藥) 업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면 수천, 수만 명의 ‘개미’ 투자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중요성은 ‘머니 게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검찰이 진행 중인 ‘패스트트랙 의회 폭력 사태’ 수사에서 어떤 의원은 기소가 되고, 어떤 의원은 화를 면할 것이다. 기소는 의원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보좌진 등 ‘딸린 식구’의 미래가, 해당 의원 지역구의 선거판이, 소속 정당의 미래 구도가 걸려 있다.

정부가 검찰 공보 규칙을 바꿔 수사 정보 공개를 막았다. 그 바람에 일종의 언론 브리핑인 ‘차장 검사 간담회’가 없어졌다.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기자가 묻고 일정 부분까지 확인해 주는 절차가 사라졌다. 공적 인물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돼도 구체적으로 무슨 혐의를 받고 있는지 검찰이 설명하지 못한다. 새 규칙 때문이다. 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이 돼 추진한 일이다. ‘혐의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고,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게 그 이유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 헌법재판소가 신빙성 높은 국가 기관의 공문서라는 이유로 검찰 수사기록을 증거 자료로 사용할 때 지금의 여권 인사들이 열렬히 손뼉을 쳤다. 2년 새 검찰 수사 내용이 ‘신뢰할 만한 공적 사실’에서 ‘일방적 주장’으로 전락했다. 현 정부가 남발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중 하나다.

검찰 정보 통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제한이 누구에게 해를 끼칠지 생각해 봤을까. 검찰과 그 주변에 딱히 아는 사람 없고, 지라시조차 접하기 힘들고, 그래서 신문과 방송에 정보를 의지해 온 소시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 게 이 정부다. 아무리 막아도 여러 사람이 보고 듣는 일이라 정보는 유통된다. ‘위험 비용’ 때문에 수혜자가 제한될 뿐이다.

서민을 위한 정부라고 하는데 빈부 격차는 더 커지고, 보통 사람에게 서울 아파트 구매가 이루지 못할 꿈이 됐다. 거기에 일반인과 특수층의 정보 격차까지 더해졌다. 정부가 합리성을 되찾는 날 반드시 바로잡혀야 할 일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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